어바리의 말본새손자가 태어났다

집안의 呱呱聲이 삼십 년도 더 지났으니 天地開闢이지


손자가 태어났다.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느낌은 ‘나도 드디어 할배가 되었구나.’ 하는 실감(實感)이었다. 그동안 주변의 친구 녀석들이 손자 손녀 들먹이며 자랑질하거나 힘들게 아이 돌본다고 엄살을 부리며 핑계 삼아 신생(新生) 후계 세대 없는 사람 기죽이려 드는 꼴을 고스란히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차에 저절로 입이 실룩거려지는 일이었다.

한국전쟁 직후의 베이비붐 세대인 할배 할매가 ‘한 집 건너 하나 낳기’에 목을 매던 산아제한 시대를 살면서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는 사실이 좀 이해하기 어렵다고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손자 손녀 자랑질하는 남들 앞에서는 할배도 할매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2월 8일 토요일은 둘째 딸의 생일이 2월 7일이라 식구들이 함께 모여 식사라도 하자고 약속했던 날이라 마침 할배 할매 부부와 3남매가 점심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당연히 태어날 녀석의 아비가 되는 셋째와 산부(産婦)인 며느리 부부는 출산 예정일을 앞두고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점심 수저를 들기도 전에 산모의 양수가 터져 병원으로 옮긴다는 소식을 시작으로 출산 중계방송이 시작되었다. 가족들이 소통하는 ‘카톡’ 방에 불이 나기 시작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고모(姑母)의 체면을 살려 하루 늦게 태어나기로 한 녀석이 기특하다는 누군가의 칭찬도 어색하지 않은 데다 음력과 양력이 둘째가 태어나던 해처럼 같이 간다는 말에 정말 그런가 싶어 괜히 신통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마침내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월 8일 오후 3시 19분. 음력으로는 1월 11일이고, 둘째 고모보다 딱 하루 늦게 태어나서 시건방지지 않고 겸손하다는 소리는 듣게 되었다. 둘째는 새삼 신기한 듯 음력도 자기보다 딱 하루 늦다고 호들갑이다. 할배 할매와 3남매가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행히 점심 밥상이라도 치운 다음이라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뻔했다.

하긴 막내도 이미 서른을 훌쩍 넘겼으니 할배 할매 직계 가족의 행사로는 아기의 탄생이 한 세대로 치는 30년도 더 지난 일인 셈이었다. 까마득한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탄생(誕生)이라고 하면 우선 고고성(呱呱聲)과 금줄이 떠오른다.

예나 지금이나 갓 태어난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상서롭게 여기기는 마찬가지일 텐데, 태어난 손자가 힘차게 울기는 했는지, 카톡 중계방송으로는 도무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굳이 ‘아기가 잘 울더냐, 울음소리가 크더냐?’ 하고 묻기는 영 어색한데, 그냥 방긋방긋 웃는 모습만으로도 자지러질 판이다.

금줄에 대한 기억은 더욱 멀어지는 느낌이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아기가 태어나는 집에는 일주일인지, 열흘인지 대문에 금줄이 걸렸는데, 숯과 고추 또는 솔잎이 매달렸던 듯하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경우 금줄에 매달리는 종류가 달랐던 것 같은데,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고,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하여 산모와 태아를 보호하려는 방역의 기능이 우선이었던 듯하다. 할배의 고향인 경상도에서는 ‘금줄’을 ‘긍구’라고 했는데, 단순히 금줄의 사투리인지, 사전에 나오는 대로 ‘삼가고 두려워함’이라는 한자 ‘긍구(兢懼)’를 금줄과 동의어로 썼는지는 알 수가 없다.

손자가 태어난 지 열흘도 채 지나지 않는 동안, 카톡방은 주야 불문 아기 사진과 짧은 동영상으로 도배가 되었다. 솔직히 역할을 상실한 할배는 손자가 웃고 재채기하는 모습만으로도 오금이 저리지만, 뾰족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할 바를 모르는 채 멀뚱멀뚱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내놓고 말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로되 할매가 할배보다 손자를 더 기다렸다는 사실은 금방 드러나고 말았다. 귀한 자손이니까 밖에 알리는 일은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는 할배의 말에도 불구하고, 할매는 이튿날 교회의 주일 집회에서 기어이 감추지 못한 채 손자 태어났다고 자랑하여 잔뜩 주위의 축하 세례를 받았다.

아직 미혼이라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첫째와 둘째인 고모(姑母)들도 아기의 탄생이 그저 신통방통한 모양이다. 아재비뻘인 막내인들 처음 보는 조카의 탄생이 신기하지 않을까. 카톡에 손자 녀석의 사진이 올라오기만 하면 저마다 오금이 저린 태도로 여간 기뻐하지 않는다. 모두 한목소리로 산모(産母)의 건강을 챙기면서 산후조리와 우울증을 걱정하고 한 목소리로 아이 아비인 셋째를 잡도리하는 모습은 오히려 정겹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처음 임신 소식을 알리러 부부가 방문한 날은 공교롭게도 할매가 태몽을 꾼 다음이었다. 집안으로 상서로워 보이는 흰 곰이 담장을 넘어 들어오는 꿈이었다는데, 저녁 식사를 하고 다과를 나누는 동안 서로가 주춤거리며 꺼내놓은 화제가 같은 이야기였다. 결혼한 지 4년여 만의 임신과 할매의 태몽이 주제였던 셈이다.  


태아의 태명(胎名)은 ‘럭끼’였다. 아이가 넷이지만, 태명은 생각지도 않았다. 첫째와 둘째는 아비인 할배의 생각대로 이름을 지었고, 9대 종손으로 태어난 셋째와 사내아이인 넷째는 집안 풍습대로 작명을 할아버지에게 맡겨 드렸다. 이번에는 특별히 집안 풍습이랄 전통도 없어서 할배의 권리를 주장하는 대신 항렬자(行列字)만 알려주고 사주명리학의 앱인지 뭔지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대입해 보고 좋은 풀이가 나오는 이름으로 짓게 했다.

손자가 태어난 지 사흘만인가, 할배 할매 고모들 아재비까지 식구들 마음에 드는 이름까지 결정되었으니, 이제는 조리원에서 산모의 산후조리에만 신경을 쓰면 되도록 매듭이 지어진 셈이었다. 그야말로 할배 집안으로 치자면 경천동지(驚天動地)라고 해야 할 천지개벽(天地開闢)의 대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거나 자라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거짓말쟁이가 된다는 말을 귓등으로 들었는데, 할매가 좋아하는 모양새를 보니 틀린 말도 아닐 성싶었다. 웃는 사진 몇 장 보고 금방 아이가 어떻게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걸로 미뤄봐서 내일모레쯤이면 손자가 “할매!”라고 큰 소리로 불렀다고 주장할 판이다. 그런 일에는 출생 당시부터 중계방송을 담당하며 첫 아이 모습에 ‘아이 바보’의 전형이 된 아비도 빠지지 않고 한몫할 태세다.

그 와중에 할배 할매 슬하의 4남매가 태어나던 때를 소환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여기서 거론하기는 적당하지도 않은 데다 할 이야기 역시 많고 많아서 셋째 넷째 태어날 때는 건강보험 혜택조차 받지 못했다는 기막힌 사실 정도만 밝혀두고, 네 아이의 엄마 역할이며 낯선 동네로 시집간 8대 종부(宗婦)의 ‘전설 따라 삼천리’의 2녀 2남 출생에 얽힌 사연은 작심하고 따로 털어놓기로 해야 할 듯하다.

다만 10대 종손으로 태어난 손자 녀석의 장래가 갑갑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막내 녀석이 결혼하겠다고 허락해 달라는 요청이 겹경사가 아닌가 싶어 할배는 사뭇 기분이 날아갈 듯하다.

이재욱(27회, 문학뉴스 대표 · 『청조인』 편집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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