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현(17회 · 『청조인』 편집위원회 고문)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속담은 세계의 중심이 로마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는 기원전 312년 고대 로마의 집정관 아피우스가 착공하여 122년 동안 건설한 아피아 가도이다. 포로 로마노의 산 세바스티아노 성문으로부터 이탈리아 남쪽 끝 장화의 뒷굽에 해당하는 브린디시까지 장장 550km에 이르는 포장도로이다. 브린디시는 그리스나 동방으로 가는 길목이기에 시저가 이집트 정벌에 나섰던 항구였으며 십자군 전쟁 때는 예루살렘으로 원정 가는 출발지이기도 했다. 요충지였던 브린디시까지 도로를 완성하고서 기쁨을 감추지 못해 축배를 들었던 조상들을 상기하면서 이탈리아인들은 요즘도 건배구호로 ‘브린디시’를 외칠 때가 많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라’나 ‘오셀로’, 그리고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 스티커나’에 브린디시 노래가 나온다. ‘길의 여왕’으로 통하는 아피아 가도는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제국의 번영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며, 2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으니 세계의 불가사의 건축물이 아닐 수 없다.
아피아 가도 (Via Appia Antica, Rome )
특히 줄리어스 시저가 암살된 후 내란을 평정하고 제정을 시작한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수로와 도로 개척에 주력함으로써 200년 동안 로마 평화를 뜻하는 ‘팍스 로마나’ 시대를 열었다. 그는 모든 길의 출발점인 로마광장에 밀리아리움 아우레움(황금 이정표)이라는 청동기둥을 세우고 각 지역 목적지까지의 거리도 표시했다. 그 후 모든 길이 통하는 이곳을 세상의 배꼽(움벨리쿰)이라고 명명했다.
도로 옆에는 귀족들의 호화스러운 무덤과 저택의 흔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로마는 황제와 신전의 여사제만이 묻힐 수 있도록 엄격히 무덤을 제한했으며, 당시는 죽은 자도 산자와 가까이 있고 싶어 했던 풍습이 있었기에 로마를 벗어난 곳에 사람이 가장 많이 왕래하는 곳인 도로 주변에 30여만 기의 묘소가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스파르타나 아테테가 융성했을 때 변방의 조그마한 도시국가로 출발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비롯하여 그리스, 스페인, 영국 등 유럽과 지중해, 북아프리카, 페르시아, 이집트까지 대제국을 넓혀나갔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중간에 자리한 로마는 남과 북을 점령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로마군 공병대의 주 업무는 도로건설이었으며 당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속주의 거점도시로 연결하는 도로가 30만 km나 되었다.
도로는 전쟁을 위한 군사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후에는 교역과 문화, 통신, 세금징수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유가 있는 로마인들은 질병 치료를 위해 티르키에 파묵칼레까지 온천욕을 즐기려 고속도로를 이용했을 정도이다. 그래서 파묵칼레 근처의 도로변에는 치료차 왔다가 죽은 사람들의 무덤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로마의 도로건설은 속전속결의 전쟁용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거리 단축을 위해 모든 도로는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길을 잃거나 잘못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마차 두 대가 교행 할 수 있는 넓이의 중앙도로 양쪽 옆에 사람이 다니는 인도를 별도로 만들었다. 자고로 길은 사람이 왕래함으로써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원칙인데 로마는 길을 만들어 사람이 다니게 했던 것이다.
우선 길을 만들기 위해 최소 1m에서 3m 정도 운하처럼 파내고 맨 아래에는 커다란 돌과 진흙을 넣고 그 위에 자갈 모래, 석회석이나 화산토로 시멘트 콘크리트를 만들었으며, 다시 흙으로 평평하게 다진 다음 포장재로 돌을 촘촘히 박았던 것이다. 도로의 바닥재료는 화산의 마그마가 굳어진 검은색 현무암을 주로 사용했다. 더러는 우리나라 경복궁 근정전이나 종묘 월대, 왕릉 길처럼 널찍한 화강암 박석(薄石)이 깔려 있어서 우툴두툴한 표면이 햇빛반사를 막아 눈이 부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가 와도 미끄러지지 않게 되어 있다. 물론 아프리카나 중동지역은 돌이 귀하므로 현지에서 쓸 수 있는 재료를 이용했다. 언덕배기 산은 파내고 높은 산은 터널을 뚫었으며 개천을 건너기 위한 다리만도 2천여 개나 된다.
마부가 오른손으로 채찍을 사용했기 때문에 오늘의 영국처럼 마차는 우측통행을 했으며 마차가 다닌 바닥돌이 마모되어 바퀴자국이 두 줄로 길게 홈이 나 있다. 간혹 마차가 덜컥거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한쪽 바퀴가 인도로 걸쳐가는 경우가 있었기에 인도 중간중간에 돌덩어리를 인도 쪽으로 눕혀둠으로써 스피드 범퍼 역할을 하도록 했다.
뙤약볕에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행군하는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길 양옆으로 사이프러스나 소나무를 심어 그늘을 만들었다. 사이프러스는 숲이 무성한 데다 뿌리가 옆으로 번져서 도로를 훼손하지 않고 밑으로 뻗는 수종이라 안성맞춤이었다. 가로수 바깥으로는 가지치기를 해서 가능한 길 안쪽으로 가지가 뻗어나가게 함으로써 숲의 터널을 만드는 조경까지 세심하게 배려를 했다. 병사의 보폭이 아주 컸던지 1 천보 걸음걸이마다 거리를 표시하는 돌기둥(miliarium)을 세웠는데 평균거리가 1.4km 정도이며 이것이 오늘날 ‘이정표(milestone)’의 어원이다.
도로 주변에는 파발마와 같은 우체국, 마차수리소, 숙박과 휴식을 위한 테르메(목욕탕)가 있었다. 로마의 중앙역인 테르미니역은 공사현장에서 목욕탕이 발굴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며 종착역을 의미하는 영어의 터미널도 여기서 파생된 말이다. 아피아 가도 1백 년 전에 최초로 만든 도로를 ‘소금길’이라고 했던 것처럼 초기에는 목적제품이나 지명을 도로에 붙였으나, 제대로 된 고속도로인 아피아 가도부터는 건설책임자의 이름을 붙여서 아드레아티나, 살라리아, 카시아 등 13개의 도로를 만들었다.
아피아 가도 (Via Appia within the ancient city of Minturno)
사도 베드로가 네로황제의 박해를 피해서 이 길을 몰래 빠져나가는 도중 예수의 환영이 갑자기 나타나자 베드로가 놀라면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쿼바디스 도미네)”라고 물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려고 로마로 간다”라고 하자 베드로가 크게 뉘우치면서 로마로 되돌아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 예수가 발현한 자리에 ‘쿼바디스 교회’가 세워져 있다. 9세기에 축조된 이 교회 안에는 예수의 발자국이 대리석에 새겨져 있는데 발길이가 27.5cm인 것으로 보아 예수의 키가 180cm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0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쿼바디스>의 작가 시엥키비치의 흉상도 교회 안에 세워져 있다. 서기 61년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를 선교하다 체포되어 처형당할 위기에 처한 바울이 “로마시민은 재판 없이 처형할 수 없다”는 시민권리를 내세워 황제 앞에서 직접 재판받기를 주장함으로써 이 길을 통해서 로마로 압송되어 왔다.
네로를 비롯한 초기 황제들은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고 싶었는데 유일한 걸림돌이 예수를 신으로 떠받드는 그리스도교인들이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이 발표될 때까지 250년간 무수한 박해를 피해 기독교인들이 숨어서 지낸 곳이 도로변의 지하공동묘지인 카타콤베이다. 원래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묘지였던 카타콤베는 기독교인들의 피난처이자 예배장소이고 무덤이었다. 이들은 화강암 암반지역을 골라 지하 5층 20m 깊이까지 파내려 가서 공동생활을 했으며 시신은 서랍장처럼 굴을 파서 안치했다. 지금까지 발굴된 카타콤베는 산 칼리스토를 비롯하여 60여 개에 이르지만 이들이 판 미로를 합하면 900km나 된다고 한다.
카타콤베에는 16명의 교황과 성녀 세실리아를 비롯한 50여 명의 순교자가 매장되어 있다.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는 카타콤베 벽면에는 기독교를 상징하는 물고기(익투수: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의 머리글자 모음)가 자주 보인다. 물고기는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를 확인하는 암호로 사용되었다. 최초의 기독교 성화는 카타콤베 벽면에 그려져 있는 프레스코화라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아피아 가도 (Roman road of Santa Agueda)
아피아 가도는 6천 명의 로마 반란군을 십자가에 묶어 처형시킨 희대의 사형장이 된 적도 있다. 전쟁포로로 잡혀와 검투사가 된 트라키아(불가리아) 출신 스파르타쿠스는 훈련소의 열악한 생활과 학대를 견디지 못해 검투사 노예인 동료들과 규합하여 기원전 73년 반란을 일으켰다. 1960년 커크더글라스 주연의 영화 ‘스파르타쿠스’에도 보여주듯이 스파르타쿠스는 시골의 양치기를 비롯한 농민들과 규합하여 7만여 명의 막강한 대규모 반란군을 이끌면서 2차례나 로마관군을 물리쳤다. 고대 로마사회는 인구 3분의 1이 노예신분인 전쟁포로였기에 대부분의 시골 노동자들은 반란군에 합류했다.
마침내 마르쿠스 크라수스 장군은 인류전쟁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데키마티오 형벌(decimatio, 10분의 1 형벌)’을 적용하여 3차 노예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데키마티오 형벌은 패배하거나 퇴각하는 부대원 전체를 10명씩 나누고 그중 제비 뽑기로 1명을 선택하여 나머지 9명이 집단구타하여 살해하는 형벌이다. 원로원은 같은 전우를 죽여야 하는 잔인함, 모멸감, 수치심을 비난하며 BC 70년부터 이 형벌을 폐지하도록 했다. 그 이후로 잔혹한 데키마티오 형벌은 사라졌지만, 전쟁이나 질병으로 집단사망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decimate)는 오늘날 영어에 남아 있다.
한편 황제나 귀족에 대한 최고의 형벌은 ‘탐나티오 메모리아에’라는 기억 지우기이다. 그동안의 업적이나 이름이 새겨진 책이나 석조물 부조를 모두 없애거나 훼손하고 그의 이름을 더 이상 거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삶의 흔적이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로마는 반란군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시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대로변에 십자가형으로 처형하면서 오래 동안 전시했던 것이다. 반란의 진원지인 카푸아에서 로마까지 아피아 가도는 십자가형으로 가로수를 만들었다. 같은 유대인에 그리스도교도인데도 베드로는 십자가형인데 비해 바울은 로마시민권 자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을 덜어주는 참수형으로 시혜를 베풀어준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형은 중인환시 속에 오래 동안 최대한의 고통을 주는 극형이었던 것이다.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스파르타쿠스 전쟁은 인류역사상 가장 정의롭고 유일하게 정당했던 전쟁이다”라고 평가했다.
아피아 가도는 신속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병력이나 무기를 이동케 함으로써 로마제국 건설에 일등공신이었고 속주로부터 세금을 걷어들이고 다스리는데 큰 기여를 했지만, 한편으로 적군이 쳐들어오는 지름길이 되어 로마제국의 몰락을 재촉하는 재앙이 되었다. 이처럼 팍스 로마나를 가져온 고속도로는 로마제국의 시작이자 끝이 된 셈이다.
우리의 조선시대에도 병자호란으로 건국 이래 최대 수모를 당한 인조가 오랑캐가 쳐들어온 대관령 고갯길을 넓혔다는 이유로 이미 고인이 된 강원도 관찰사 고봉산에게 책임을 물어 부관참시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는 실제로 의주로를 통해서 왔기에 아무 관련이 없는데도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한 것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오솔길이나 다름없는 영남대로가 적의 침입로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더 이상 길을 넓히지 않았다.
과거 모든 왕국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성을 쌓았지만 로마제국은 길을 닦았다. 길은 소통과 개방성의 상징이다. 로마가 지식에서는 그리스에 뒤지고, 기술에서는 에투리아인에 뒤지며, 체력에서는 게르만족에 뒤지지만 유례가 없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노예도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개방과 포용정책 덕분이다.
“아피아 구가도를 걷지 않고서는 길을 논하지 말라”는 로마인들의 자부심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김동현(17회 · 『청조인』 편집위원회 고문)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속담은 세계의 중심이 로마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는 기원전 312년 고대 로마의 집정관 아피우스가 착공하여 122년 동안 건설한 아피아 가도이다. 포로 로마노의 산 세바스티아노 성문으로부터 이탈리아 남쪽 끝 장화의 뒷굽에 해당하는 브린디시까지 장장 550km에 이르는 포장도로이다. 브린디시는 그리스나 동방으로 가는 길목이기에 시저가 이집트 정벌에 나섰던 항구였으며 십자군 전쟁 때는 예루살렘으로 원정 가는 출발지이기도 했다. 요충지였던 브린디시까지 도로를 완성하고서 기쁨을 감추지 못해 축배를 들었던 조상들을 상기하면서 이탈리아인들은 요즘도 건배구호로 ‘브린디시’를 외칠 때가 많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라’나 ‘오셀로’, 그리고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 스티커나’에 브린디시 노래가 나온다. ‘길의 여왕’으로 통하는 아피아 가도는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제국의 번영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며, 2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으니 세계의 불가사의 건축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줄리어스 시저가 암살된 후 내란을 평정하고 제정을 시작한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수로와 도로 개척에 주력함으로써 200년 동안 로마 평화를 뜻하는 ‘팍스 로마나’ 시대를 열었다. 그는 모든 길의 출발점인 로마광장에 밀리아리움 아우레움(황금 이정표)이라는 청동기둥을 세우고 각 지역 목적지까지의 거리도 표시했다. 그 후 모든 길이 통하는 이곳을 세상의 배꼽(움벨리쿰)이라고 명명했다.
도로 옆에는 귀족들의 호화스러운 무덤과 저택의 흔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로마는 황제와 신전의 여사제만이 묻힐 수 있도록 엄격히 무덤을 제한했으며, 당시는 죽은 자도 산자와 가까이 있고 싶어 했던 풍습이 있었기에 로마를 벗어난 곳에 사람이 가장 많이 왕래하는 곳인 도로 주변에 30여만 기의 묘소가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스파르타나 아테테가 융성했을 때 변방의 조그마한 도시국가로 출발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비롯하여 그리스, 스페인, 영국 등 유럽과 지중해, 북아프리카, 페르시아, 이집트까지 대제국을 넓혀나갔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중간에 자리한 로마는 남과 북을 점령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로마군 공병대의 주 업무는 도로건설이었으며 당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속주의 거점도시로 연결하는 도로가 30만 km나 되었다.
도로는 전쟁을 위한 군사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후에는 교역과 문화, 통신, 세금징수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유가 있는 로마인들은 질병 치료를 위해 티르키에 파묵칼레까지 온천욕을 즐기려 고속도로를 이용했을 정도이다. 그래서 파묵칼레 근처의 도로변에는 치료차 왔다가 죽은 사람들의 무덤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로마의 도로건설은 속전속결의 전쟁용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거리 단축을 위해 모든 도로는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길을 잃거나 잘못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마차 두 대가 교행 할 수 있는 넓이의 중앙도로 양쪽 옆에 사람이 다니는 인도를 별도로 만들었다. 자고로 길은 사람이 왕래함으로써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원칙인데 로마는 길을 만들어 사람이 다니게 했던 것이다.
우선 길을 만들기 위해 최소 1m에서 3m 정도 운하처럼 파내고 맨 아래에는 커다란 돌과 진흙을 넣고 그 위에 자갈 모래, 석회석이나 화산토로 시멘트 콘크리트를 만들었으며, 다시 흙으로 평평하게 다진 다음 포장재로 돌을 촘촘히 박았던 것이다. 도로의 바닥재료는 화산의 마그마가 굳어진 검은색 현무암을 주로 사용했다. 더러는 우리나라 경복궁 근정전이나 종묘 월대, 왕릉 길처럼 널찍한 화강암 박석(薄石)이 깔려 있어서 우툴두툴한 표면이 햇빛반사를 막아 눈이 부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가 와도 미끄러지지 않게 되어 있다. 물론 아프리카나 중동지역은 돌이 귀하므로 현지에서 쓸 수 있는 재료를 이용했다. 언덕배기 산은 파내고 높은 산은 터널을 뚫었으며 개천을 건너기 위한 다리만도 2천여 개나 된다.
마부가 오른손으로 채찍을 사용했기 때문에 오늘의 영국처럼 마차는 우측통행을 했으며 마차가 다닌 바닥돌이 마모되어 바퀴자국이 두 줄로 길게 홈이 나 있다. 간혹 마차가 덜컥거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한쪽 바퀴가 인도로 걸쳐가는 경우가 있었기에 인도 중간중간에 돌덩어리를 인도 쪽으로 눕혀둠으로써 스피드 범퍼 역할을 하도록 했다.
뙤약볕에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행군하는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길 양옆으로 사이프러스나 소나무를 심어 그늘을 만들었다. 사이프러스는 숲이 무성한 데다 뿌리가 옆으로 번져서 도로를 훼손하지 않고 밑으로 뻗는 수종이라 안성맞춤이었다. 가로수 바깥으로는 가지치기를 해서 가능한 길 안쪽으로 가지가 뻗어나가게 함으로써 숲의 터널을 만드는 조경까지 세심하게 배려를 했다. 병사의 보폭이 아주 컸던지 1 천보 걸음걸이마다 거리를 표시하는 돌기둥(miliarium)을 세웠는데 평균거리가 1.4km 정도이며 이것이 오늘날 ‘이정표(milestone)’의 어원이다.
도로 주변에는 파발마와 같은 우체국, 마차수리소, 숙박과 휴식을 위한 테르메(목욕탕)가 있었다. 로마의 중앙역인 테르미니역은 공사현장에서 목욕탕이 발굴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며 종착역을 의미하는 영어의 터미널도 여기서 파생된 말이다. 아피아 가도 1백 년 전에 최초로 만든 도로를 ‘소금길’이라고 했던 것처럼 초기에는 목적제품이나 지명을 도로에 붙였으나, 제대로 된 고속도로인 아피아 가도부터는 건설책임자의 이름을 붙여서 아드레아티나, 살라리아, 카시아 등 13개의 도로를 만들었다.
아피아 가도 (Via Appia within the ancient city of Minturno)
사도 베드로가 네로황제의 박해를 피해서 이 길을 몰래 빠져나가는 도중 예수의 환영이 갑자기 나타나자 베드로가 놀라면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쿼바디스 도미네)”라고 물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려고 로마로 간다”라고 하자 베드로가 크게 뉘우치면서 로마로 되돌아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 예수가 발현한 자리에 ‘쿼바디스 교회’가 세워져 있다. 9세기에 축조된 이 교회 안에는 예수의 발자국이 대리석에 새겨져 있는데 발길이가 27.5cm인 것으로 보아 예수의 키가 180cm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0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쿼바디스>의 작가 시엥키비치의 흉상도 교회 안에 세워져 있다. 서기 61년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를 선교하다 체포되어 처형당할 위기에 처한 바울이 “로마시민은 재판 없이 처형할 수 없다”는 시민권리를 내세워 황제 앞에서 직접 재판받기를 주장함으로써 이 길을 통해서 로마로 압송되어 왔다.
네로를 비롯한 초기 황제들은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고 싶었는데 유일한 걸림돌이 예수를 신으로 떠받드는 그리스도교인들이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이 발표될 때까지 250년간 무수한 박해를 피해 기독교인들이 숨어서 지낸 곳이 도로변의 지하공동묘지인 카타콤베이다. 원래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묘지였던 카타콤베는 기독교인들의 피난처이자 예배장소이고 무덤이었다. 이들은 화강암 암반지역을 골라 지하 5층 20m 깊이까지 파내려 가서 공동생활을 했으며 시신은 서랍장처럼 굴을 파서 안치했다. 지금까지 발굴된 카타콤베는 산 칼리스토를 비롯하여 60여 개에 이르지만 이들이 판 미로를 합하면 900km나 된다고 한다.
카타콤베에는 16명의 교황과 성녀 세실리아를 비롯한 50여 명의 순교자가 매장되어 있다.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는 카타콤베 벽면에는 기독교를 상징하는 물고기(익투수: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의 머리글자 모음)가 자주 보인다. 물고기는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를 확인하는 암호로 사용되었다. 최초의 기독교 성화는 카타콤베 벽면에 그려져 있는 프레스코화라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아피아 가도는 6천 명의 로마 반란군을 십자가에 묶어 처형시킨 희대의 사형장이 된 적도 있다. 전쟁포로로 잡혀와 검투사가 된 트라키아(불가리아) 출신 스파르타쿠스는 훈련소의 열악한 생활과 학대를 견디지 못해 검투사 노예인 동료들과 규합하여 기원전 73년 반란을 일으켰다. 1960년 커크더글라스 주연의 영화 ‘스파르타쿠스’에도 보여주듯이 스파르타쿠스는 시골의 양치기를 비롯한 농민들과 규합하여 7만여 명의 막강한 대규모 반란군을 이끌면서 2차례나 로마관군을 물리쳤다. 고대 로마사회는 인구 3분의 1이 노예신분인 전쟁포로였기에 대부분의 시골 노동자들은 반란군에 합류했다.
마침내 마르쿠스 크라수스 장군은 인류전쟁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데키마티오 형벌(decimatio, 10분의 1 형벌)’을 적용하여 3차 노예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데키마티오 형벌은 패배하거나 퇴각하는 부대원 전체를 10명씩 나누고 그중 제비 뽑기로 1명을 선택하여 나머지 9명이 집단구타하여 살해하는 형벌이다. 원로원은 같은 전우를 죽여야 하는 잔인함, 모멸감, 수치심을 비난하며 BC 70년부터 이 형벌을 폐지하도록 했다. 그 이후로 잔혹한 데키마티오 형벌은 사라졌지만, 전쟁이나 질병으로 집단사망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decimate)는 오늘날 영어에 남아 있다.
한편 황제나 귀족에 대한 최고의 형벌은 ‘탐나티오 메모리아에’라는 기억 지우기이다. 그동안의 업적이나 이름이 새겨진 책이나 석조물 부조를 모두 없애거나 훼손하고 그의 이름을 더 이상 거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삶의 흔적이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로마는 반란군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시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대로변에 십자가형으로 처형하면서 오래 동안 전시했던 것이다. 반란의 진원지인 카푸아에서 로마까지 아피아 가도는 십자가형으로 가로수를 만들었다. 같은 유대인에 그리스도교도인데도 베드로는 십자가형인데 비해 바울은 로마시민권 자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을 덜어주는 참수형으로 시혜를 베풀어준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형은 중인환시 속에 오래 동안 최대한의 고통을 주는 극형이었던 것이다.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스파르타쿠스 전쟁은 인류역사상 가장 정의롭고 유일하게 정당했던 전쟁이다”라고 평가했다.
아피아 가도는 신속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병력이나 무기를 이동케 함으로써 로마제국 건설에 일등공신이었고 속주로부터 세금을 걷어들이고 다스리는데 큰 기여를 했지만, 한편으로 적군이 쳐들어오는 지름길이 되어 로마제국의 몰락을 재촉하는 재앙이 되었다. 이처럼 팍스 로마나를 가져온 고속도로는 로마제국의 시작이자 끝이 된 셈이다.
우리의 조선시대에도 병자호란으로 건국 이래 최대 수모를 당한 인조가 오랑캐가 쳐들어온 대관령 고갯길을 넓혔다는 이유로 이미 고인이 된 강원도 관찰사 고봉산에게 책임을 물어 부관참시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는 실제로 의주로를 통해서 왔기에 아무 관련이 없는데도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한 것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오솔길이나 다름없는 영남대로가 적의 침입로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더 이상 길을 넓히지 않았다.
과거 모든 왕국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성을 쌓았지만 로마제국은 길을 닦았다. 길은 소통과 개방성의 상징이다. 로마가 지식에서는 그리스에 뒤지고, 기술에서는 에투리아인에 뒤지며, 체력에서는 게르만족에 뒤지지만 유례가 없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노예도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개방과 포용정책 덕분이다.
“아피아 구가도를 걷지 않고서는 길을 논하지 말라”는 로마인들의 자부심에 고개가 끄덕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