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림의 어슬렁어슬렁길불유구(不踰矩)의 나이에 색깔 모자, 청바지, 워킹화 패션이 차림새

정해생(丁亥生) 돼지띠이니 어영부영하다가 어느덧 팔십을 눈앞에 둔 나이가 되었다. 오십대가 되었을 때만 해도 ‘벌써?’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지만, 육십이란 말을 들을 때는 이젠 나도 정말 노인 대열에 끼었구나 싶어 마음 한구석이 조금은 헛헛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낼모레면(?) 팔십 노인이라고 불릴 판이다.

뒤돌아보면, 나도 역시 대부분의 우리 세대가 피할 수 없었던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었다. 없는 집안의 장남으로서 부모를 봉양하고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의무를 어깨에 지고, 사회적으로는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세!’라는 7~80대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오면서, 자의든 타의든 민주화와 경제발전이라는 두 토끼를 잡겠다는 사회적인 흐름에 휩쓸려 발버둥을 치지 않았던가!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과거의 내 인생은 나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는 살아왔으나 그때의 나는 집안의 가장, 회사의 부장 혹은 임원이었을 뿐 자연인으로서의 황 아무개는 없었던 것 같다. 자식으로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비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나의 행복인 줄 알았고, 과장에서 부장, 임원으로 승진하여 많은 직원을 이끄는 것이 나의 기쁨이자 보람인 줄 알았다. 물론 그런 것들이야 집안을 이끌어야 하는 가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러면서 항상 가슴 한가운데에서 이는 찬바람을 시리게 느끼면서 살아온 사람이 나뿐일까?

이제 나에게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남은 것이 많지 않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어야 할 직장이 없다 보니 영업실적에 대한 스트레스도 없고(따라서 수입도 없고), 더 이상 가족부양에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며(그래서 때로는 자신이 언제 내버려도 아깝지 않은 헌 짚신같이 느껴질 때도 있고), (일부러 그러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다소 결례를 저질러도 남들이 너그러이(?) 봐주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요새는 주위의 일들을 나 자신에게 연관 지어 봐서 내가 기쁨을 느끼는 일이나 놀이에 관심을 기울이려 애쓰고 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거리낄 게 없다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경지까지는 아니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래도 아직은 내게 무언가 남은 것도 있을 테니,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나는 나이에 비해서 건강하다고 자부한다. 매일 먹는 약이라고는 제일 낮은 단위의 혈압약 한 알뿐이고, 관절이나 디스크도 문제가 없으며, 임플란트는 이름만 들어봤고, 백내장이나 녹내장 같은 탈도 없다. 매일 새벽 가까이 있는 봉화산을 1년이면 365회 오르며 짧은 시를 한 수씩 지어서 그에 맞춰 그린 핸드폰 그림과 함께 이천 명 가까운 지인들에게 보내고, 스트레칭과 허리 운동에 더하여 팔굽혀펴기 칠십 회 등 삼십 분 정도 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언젠가는 내 건강도 노화에 밀리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괜찮은 수준인 것 같다.

요즘은 혼례나 장례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색깔 있는 모자에다 청바지 입고 워킹화를 신으니까, 겉보기도 좀 젊어 보이는지, 한 달에 한 번 정도 이발을 겸해서 가는 사우나에서 가끔 경로가 맞느냐고 물어서 기분이 좋다. 전철을 이용할 때도 두어 번 경로우대가 맞는지 불심검문(?)을 당했던 적이 있다.

반세기도 더 이전 학창 시절 연극에 빠진 적이 있었다. 몇 개월 동안 대사와 동선, 감정이입 연습을 한 후에 무대공연을 끝내고 막이 내려올 때 듣던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의 짜릿한 맛을 잊지 못하여 졸업 후에도 연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회에 나와서는 흔히 하는 말로 ‘먹고살기 바빠서’ 언감생심 그런 꿈을 꾸지 못하다가 정년퇴임 후에야 연기의 길을 찾아 나섰다. 그래서 지난 십여 년 동안 시니어 모델 겸 연기자로서 영화, 드라마, 광고에 얼굴을 내밀고 있고 1년에 한두 번 연극 무대에도 오르다 보니 공식적인 경연대회에서 연기상도 몇 번 받았다. 수입은 거의 없지만 (연극은 오히려 돈을 내야 한다!) 카메라 앞에 서거나 무대에 오르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이런 나에게 친구들은 ‘황 스타’라는 새로운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나도 은근히 이 별명이 마음에 든다.

학생 때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했고, 은퇴 후에 동화와 희곡으로 등단도 하고, 몇 문학잡지에는 꾸준히 투고도 하다 보니 제1회 산림문학상도 받았으며, 근년에는 웅진문학상에 소설로 응모하여 대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아침마다 여러 카톡방에 올리는 졸시(拙詩)와 그림을 감상하고 꽤 많은 분이 댓글도 달아주어서 글 쓰는 재미를 느낀다.

내 얼굴은 꽤 수염이 많이 나는 편이다. 그런데 이 수염이 얼굴 전체에 골고루 나면 사극에 나오는 점잖은 대감 같은 표정이 될 텐데, 내 얼굴의 수염은 마치 화전민이 갈아놓은 밭처럼 여기저기 공터(?)를 만들어 놓아서 영 볼품이 없다. 그래서 직장에 다닐 때는 매일 면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퇴직을 하고 나니까 좀 게으름이 생겨서 요즘엔 이틀에 한 번씩 한다. 그런데 면도하고 거울을 보면 그래도 아직은 봐줄 만한(?) 얼굴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바보처럼 혼자 실실 웃는다.

거지는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은 많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또래의 퇴직자들은 오라는 데도 별로 없고, 갈 데도 마땅치 않은 경우가 많다. 현직을 떠나면서 사회에서 주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과의 연이 대부분 끊기게 마련이니 오라는 데가 많지 않고, 집과 직장만을 시계추처럼 다니던 사람들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내 수첩이나 달력에는 매달 무슨 친구들 모임이나 결혼 청첩 등 오라는 데가 몇 군데씩은 있어서, 그래도 아직은 내가 남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흐뭇하다. 또한 매주 고등학교 오비 합창단과 연극단에서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때로는 꽤 바쁘기도 하다.

전철을 타면 열 명에 일고여덟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무슨 급하거나 중요한 일 때문이 아니라 그냥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그러는 것 같다. 연극이나 합창 활동을 하다 보니 주위 사람들과 소통할 필요가 있어 나 역시 스마트폰 들고 다니며 카톡이나 밴드도 한다. 하지만 마구잡이로 퍼 나르는 이런저런 정보는 정말 귀찮을 때가 많다. 그러나 간혹 그중에 쓸 만한 것을 건질 때도 있고, 또 그런 정보를 나에게까지 알려주는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 나 자신을 달래본다.

노인네들의 처신에서 주의할 점 중 하나가 몸을 자주 씻어서 소위 노인 냄새를 풍기지 말라는 것이다. 특히 우리 집사람은 과민할 정도로 냄새에 민감해서, 사람을 만나러 갈 때는 꼭 샤워하라고 다그친다. 그래서 밖에 나갈 때는 샤워에 옷까지 갈아입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는 주지 않은 것 같은데 혹시 그 사람들이 이 노인네 체면을 생각해서 모른 척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실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 나이쯤 되면 뒷골방에서 콜록콜록 밭은기침을 하며 갈 날만 기다리던 신세였다. 요즘도 우리 나이는 어느 모임을 가도 거의 최고 연장자 대접을 받는데, 그러다 보니 혹시 후배들이 내가 그만 나오기를 바라지 않을까 하는 자격지심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항상 전철이나 버스를 갈아타며 애써 시간 맞춰서 모임에 나가는데, 그래도 아직은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가 많아 오히려 내가 더 고맙다.

이런저런 내 주위 사람들이 그래도 아직은 나한테 관심을 두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그리고 나도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고 기쁨과 보람을 찾으며 살려고 노력한다. 건강이 아무리 좋아도 언젠가는 내 인생의 서산에도 해가 기울어 밤이 오겠지만, 내 아호인 하림(霞林)처럼 ‘노을 진 붉은 숲’이 그래도 아직은 아름답게 보이기를 바라면서 살아가고 있다.

황우상(19회, 시인, 작가,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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