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조만담[제3화] 3학년 5반 별난 아이들

2024-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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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사투리

요즘 '친구' 라는 영화가 화제가 되고 있다. 감독이 우리 동문이고 교복과 모표 등이 부산고와 닮았다 하여 혹시나 하고 모교와 관계 있는 이야기를 기대하고 갔다간 실망할 것이다.

영화 내용이 '공부하는 학교', '공부밖에 몰랐던(?) 학교' 이었던 부산고의 이미지와는 영 딴판이니까. 그래도 이 영화는 세 가지 측면 즉, '부산'이라는 지역과 '고교 동창'을 소재로 하여 '친구'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 것만으로도 큰 공(?)을 세웠다고 본다. 인터넷에는 '친구'를 보기 전에 숙지해야할 용어사전까지 나왔다고 하는데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밥문나", "단디해라", "만다꼬", "개안타" 같은 사투리가 이렇게 거국적으로 사랑(?)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미국의 미시간 호수에 우리 남한을 빠뜨리면 퐁당하고 소리가 난다는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곳곳마다 말이 다르니 별나긴 별난 민족임을 실감한다.

나는 평소 경상도말이 우리 나라에서 가장 속도감 있는 尖端語(첨단어)임을 주장해 왔다. 그 중에서도 부산말이 가장 스피디하다. 가지 꼭지 다 치고 핵심으로 바로 간다. 개그시리즈에서 경상도 남편의 귀가 후 하는 말이 "밥 도~(저녁밥 채려달라)", "아~는?(애들은 별일 없나?)", "자자". 이 세 마디뿐이라 하여 한 때 유행한 적이 있었다. 모두들 이 무뚝뚝한 경상도 사내에 대하여 웃고 말지만 이에는 단순한 웃음만이 아닌 진한 페이소스가 있다. 우리 시대 가장의 피곤한 일상이 다 들어 있다.

모든 것이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 말을 빙빙 돌려가며 눈치코치 보다가는 정작 타야할 버스를 타지 못한다. 예컨대, "통행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라고 고지식하게 있는대로 예의를 차리다가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버스는 지나가고 만다. 

이 긴 표준말을 부산사람들은 단칼에 조진다. "걸거치서 미안하요."라고, 이 얼마나 간단한가.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 하고 있다. 이런 식의 말은 현대의 첨단 컴퓨터가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경상도에서는 수십, 수백 년간 자연스레 써 왔다. 뿐만 아니다. 음악적 고저장단 또한 일품이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인가?"를 부산에서는 "가~가 가~가?"로끝내버린다. 어느 누가 우리말에는 중국과 같은 四聲이 없다고 했나? 

신말업 장군(8회)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전투에서 부산말을 알아듣지 못해 죽은 억울한 서울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소대장이 "수구리!" 하고 외쳤으나 이 말이 "머리를 숙여라"는 말인 줄 알아듣지 못한 사병들은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요행 살아남은 자들도 다시 "아까 매로!" 하고 외치는 지휘관의 말이 "아까 했던 것과 똑같이 머리를 수그려라" 라

는 말인 줄 몰라 마저 죽었다는 얘기는 몇 번을 들어도 웃음이 난다. 사실 촉급한 전쟁터에서는 핵심적 간결체가 필수적인데 이에는 부산말이 가장 적합하다 하겠다.

흔히 부산 사람들은 말이 거칠고 목소리가 커서 대화하는 것도 마치 싸우는 것 같다고 핀잔을 듣기도 한다. 내가 알기에 이에는 약간 비린 사연이 있다. 요새야 다르지만, 부산은 뱃놈(?)들이 많았고 바람이 거세니 이물에서 고물로 소리치지 않고는 의사소통이 될 수 없었다. 자갈치 아지매나 국제시장 아재가 고분고분 말해서 개기(고기) 한 동가리(토막), 무명 당꼬(바지) 한 쪼가리 팔겠는가. 그 억센 소리 뒤에는 이렇듯 고된 생존의 역사가 있다. 조용조용 말하는 것은 듣기에 좋으나 사바사바하기에도 좋은 말이니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닐 게다. 나설 때 나서서 거침없고 숨김없이 할 말을 다하다가도 화통한 술 한잔에 온 마음을 열어 놓는 부산은 사람냄새가 물씬 나는 고장이다. 바다를 닮아 뒤엎기도 잘 하나 그때 뿐이지 도무지 뒤가 없다. 누구처럼 전리품을 챙기지도 못한다. 부마항쟁으로 독재를 무너뜨리고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스타덤에 올려주고도, 박종철의 목숨을 민주와 바꾸고도 과실을 따먹지는 못했다. 이수현이는 일본까지 가서 삼대원수를 殺身(살신)으로 갚았다.

친구들은 어떠한가?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고 했는데 마누라만 빼놓고 다 바꿀 수 있는 친구는 대개 고교동창 사이에서 나온다. 속없이 다 내주고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말로는 "문디 자슥 지랄하네" 하고 욕지거리에 랩송으로 씨부려도 속정은 世紀가 바뀌어도 못 버리고 옛날 그대로니 이것은 좋은 일인가. 바보짓인가.

우리 3학년 5반에도 그런 친구가 많았다. 부산고는 인근 라이벌 경남고에 비해 부산시내 출신 학생들보다 타지 촌놈들이 월등 많았다. 영남 일원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우수한 학교였으니 당연한 현상이었다고 할까. 당시에는 TV, 냉장고는 생활기록부에 그 유무를 기재할 정도로 귀했고, 가까운 거리에도 교통이 불편하면 내왕이 없던 연대였으니 같은 경상도라도 구사하는 억양과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여기 저기서 모여든 학생들이 마치 다른 못에 놀던 개구리를 잡아다가 한데 섞어놓은 격이 되어 처음에 서로 의사 소통이 어려웠던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부산 속의 부산이라 할 수 있는 중심지 동광동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이석재 군에 의하면 당시 서면까지는 그래도 부산시로 쳐주었으나 그 이상의 변두리지역 예컨대. 거제리, 연산동, 광안리, 동래, 사상, 구포, 대저 등은 반촌 내지 오지였고 그보다 더 먼 함양 산청 같은 지역은 아예 무슨 부시맨이 사는 야만 지역 정도로 인식되었는데 이런 데서 온 학생들이 쓰는 말은 숭악한 보리문둥이 사투리로 급히 말할 때는 무슨말을 하는지 한참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가만히 보니 저들 촌놈들끼리도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 기가 찼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부산고의 별칭이 '초량에 모인 촌놈들 학교'라 해서 '초량농고'라고 불렀으랴, 남들도 그렇게 불렀지만 스스로 그렇게 불려도 크게 불쾌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석재군 같은 시티보이들은 억울했겠지만. 이처럼 부산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촌놈들이 많이 오다보니 이들은 자연히 초량 일대에서 하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 거리라 해도 예컨대, 삼랑진, 밀양, 물금, 월내, 구포, 사상 같은 경부선이나 송정, 기장, 울산, 동래 같은 동해남부선 기차가 지나가는 교통이 좋은(?) 지역에서는 기차 통학생이 많았으나, 마산, 여수, 함안. 산청, 합천, 창녕, 의령, 진주, 하동, 남해, 통영, 고성, 사천, 삼천포, 진해, 창원, 김해 등 서부 경남 지역출신이나 기타 강릉, 경주, 서울 등 교통이 불편한 전국구 출신들은 도리 없이 하숙을 해야만 했다. 부모로부터 떨어져 일찍부터 고독과 함께 자유도 만끽할 수 있었던 조기 유학파들의 애환을 들어보자.


#'똥구두' 와 '용달차'

당시 유학풍토를 보면 돈이 많은 학생들은 드물었고, 대부분 고향집에서 논팔아 소팔아 공부시키는 어려운 형편들이었다. 당시는 너나 없이 어려워 구제품이나 군대용품을 많이썼는데 대표적인 것이 '똥구두' 였다. 이 똥구두는 '워커' 라고도 부르는 군화로서 굽이 높고 일일이 손으로 끈을 매어야 하는데 뭉툭스러우나 질기고 튼튼해 어디든 만능으로 사용되었다. 하도 신어 밑창이 덜렁거리면 수선하여 신었는데 그모양이 헤어져도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또, 책가방을 군것질(?)에 잡혀먹고 찾지 못해 천으로 된 보자기에 책을 둘둘 말아 옆에 끼고 다니는 친구도 있었다. 하숙집에서 싸주는 노란 양은 도시락을 책과 함께 그 보따리에 싸서 옆에 끼고 걷거나 달리다보면 국물이 배어 나와 책은 물론이고 옷에 배여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친구도 있었다. 가방 없이 다니면 저학년들은 교문에서 걸리지만 고학년이 되면 그런 걱정은 없었다. 형편이 보다 어렵거나 하숙비가 쪼들리는 친구는 하숙 주인집 아이나 초 · 중학생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공부 잘하는 Y군은 다른 반 아이 학부모로부터 초빙(?) 받아 그 집에 기숙하면서 집에서는 그 아이를 선생으로 가르치고 학교에서는 친구로서 같이 수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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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구두를 하도 신고 다녀 '똥구두'라는 별명을 얻은 P군은 매우 착실한 학생인데 하도 룸메이트가 술 마시고 담배피우며 노는 것을 좋아하는 바람에 학습을 못해 하숙을 옮기기로 하였다. 이 룸메이트는 역마살이 끼었는지 싸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 그가 은근히 좋아했던 누나뻘 하숙집 딸로부터 '용달차' 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도 처음에는 착실한 학생이었는데 하숙을 하다보니 노는 분위기에 물이 들어 자기도 몰래 남에게 폐를 끼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당시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숙을 하다보면 경비를 줄이려 한 방을 쓰게 된다. 하숙집으로서도 여러 학생을 쳐야 수지를 맞출 수 있으므로 선후배 동창들과, 때로는 타교생들과 혼숙을 강요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면 입주하는 날, 이사가는 날, 생일날, 고향 가는 날, 갔다 오는 날, 뭐구실거리는 얼마든지 있게 마련이고 그 때마다 파티가 벌어진다. 노래는 아직 최희준의 '하숙생'이 나오기 전이라 '울려고 내가 왔던가', '울고 넘는 박달재' 같은 학생답지 않게 청승스러운 노래만 불렀다. 새로 나온 노래 예컨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가 나오면 배우랴 가르쳐주랴 돼지들의 합창이 밤늦도록 목을 따곤 했다. 담배 같은 것도 선배들이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고 사온 담배는 눈알을 부라리며 피우게 하고 술을 먹이는지라 유학 와서 맨 먼저 배우는 것이 주색잡기(?)였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웬만한 결심이 없으면 이 유혹을 비켜가기 어려웠다.

'똥구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작심을 한 것인데 문제는 골칫거리 룸메이트 '용달차'다. 그가 따라붙을까 친척집으로 들어간다고 거짓말을 해놓고 초량 철도관사를 지나 약간 값이 싼 고관 너머 수정동 쪽으로 리어카에 책나부랭이를 싣고 이사를 갔다. 이사는 남이 안볼 때를 골라 저녁답에 하는 게 요령이다. 끙끙대며 좁은 골목길을 올라가 막 대문을 들어서는데 바로 새 하숙집 마루에 그 '용달차'가 떡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기겁을 하고 놀라면서도 "과연 '용달차'는 용달차구나. 안 가는 데가 없으니" 하고 내심 혀를 찼다. 뒤에 알고 보니, 그도 사정을 알고 온 것이 아니라 이 집에 진작부터 하숙하고 있는 자기 동향 친구에게 놀러은 것이 공교롭게도 맞부딪치게 된 것이라한다. 당연히 "똥구두'의 얼굴은 똥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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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기 누고? 일마 이거 봐라, 뭐 친척집에 간다꼬? 예라이 호랑말코 같은 자슥아, 곱게 내가 싫으모 실타카지 더럽구로" 하고 '용달차'는 거칠게 시비의 엔진을 걸었다.

"어, 어 그기 앙이고 하숙비 땜새 싼 데로 옮길라 칸 기 이래 돼뿌따 앙이가."

"치아라 일마야, 니 마음 다 안다. 그래, 니 혼자 잘 묵고잘 살아라." 하고 '용달차'는 검은 매연 같은 독기를 내뿜고 휑하니 가버렸다. 그 날 밤 벌어진 입주 환영식에서 '똥구두'는 '용달차'의 친구에게 실정을 이야기하고 오해를 풀어주도록 거간을 부탁하였다. 이 친구는 '용달차'와 동향으로 착실한 친구였다. 키는 작았으나 작은 고추가 맵다고 이론이 정연하고 까뮈와 카프카의 차이점에 대하여 개똥철학을 구사할 수 있는 친구였다.

이 '개똥철학'의 거중 조정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 사이가 서먹해져 '똥구두'와 '용달차'는 학교에서 마주치면 얼굴을 돌리고 피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대로 가면 평생 원수가 될판이었다. 그러던 중, '용달차'가 하숙집 아들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키다가 주인 아저씨에게 들켜 하숙집을 쫓겨날 지경이 되었다. 갈 데가 없어진 그를 '개똥철학'이 설득했다.

"'똥구두'가 그라든데 니한테 미안하다고 하면서 같이 있자카더라, 니만 개안타면." "그거 참말이가? 글마 그기 그래는 안 할라 할 낀데" "하모, 틀림없다. 니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 놀러와 봐라." 이렇게 해 놓고 '개똥철학'은 '똥구두'를 설득했다.

"야, '용달차'가 니한테 잘몬했다 카더라. 전에 동거할 때 지가 심했다고, 니는 마, 틀림없이 S대에 갈 놈인데 지는 갈 수 없는 실력이라 심술이 나서 그랬다고." '개똥철학' 의 꾸며낸 '카더라' 방송을 들은 '똥구두'는 심한 자책감을 느끼고 그와 함께 있을 것을 제의하였다. 그 날 저녁, 셋은 한 방에 앉았다. 물론 소주잔도, 담배 재띨이도 없이 찬물만 마셔가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똥구두'가 말하기를 "야. 용달차야. 우리 함께 S대를 목표로 쪼아 보자, 니도 학과만 잘 선택하모 문제 엄시 들어갈 수 있을 끼다. 내 도와주께" "앙이다. 너거나 열심히 해라. 나는 나대로 할 낀께네."

그 후 이 셋은 더욱 친해졌고, 하교길에 지나치는 포장마차에서도 오뎅 국물이나 풀빵은 사 먹었지만 술, 담배는 하지않고 서로 격려하여 공부에 전념하였다. 자칫 하숙생활은 고삐 풀린 망아지의 집단같이 모였다 하면 좋은 쪽보다는 나쁜쪽으로 서로 닮고 물들고 하는 것이라 대개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결말이 나기 십상인데 이 이바구는 해피엔딩으로 끝나 별로 재미가 없을 듯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잘못된 길을 가지 않고 서로 도와 바른 길을 찾아간 부고생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 셋은 뒤에 원하는 대학에 모두 진학하여 지금도 영화 속 '친구' 이상의 친구로 만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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