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조만담[제2화] 3학년 5반 별난 아이들

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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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구리' 맞는 교사

5월 12일 오전 10시20분쯤 광주K고 3학년 5반 교실에서 김모(33)교사가 동료교사에게 욕설을 한 정모(18)군을 나무라며 목덜미를 한차례 때렸다. 그러자, 정군이 반발했고 김 교사가 정군을 끌고 교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김모(19)군 등 남학생 4명과 여학생 10여명이 막아서서 한 학생이 김교사의 팔을 비틀었고 다른 학생들이 김교사를 쓰러뜨린 뒤 발로 마구 짓밟았다. 이 때문에 김교사는 가슴에 멍이 들고 발이 부어 올랐다.···"

이것은 지난 달 스승의 날에 중앙일보 사회면에 보도된 기사다. '스승의 날' 사흘 전에 가르치는 제자로부터 폭행을 당한 김교사는 학교 입장을 생각하여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으나 폭행에 가담한 학생들은 물론 그 현장에 함께 있었던 36명 전원이 사후 학교측의 폭행여부 조사에서 "선생님을 만류했을 뿐 폭행하지는 않았다"고 부인하는 행위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 사건을 공개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나라 교육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스승과 학생은 권위와 애정의 사제 관계가 아닌 폭력과 거짓이 난무하는 시정잡배 관계로 전락하고만 느낌이다.

동료교사인 60대의 노교사에게 욕설을 했을 뿐만 아니라 시험에 늦게 들어온 학생을 나무란 김교사는 지극히 당연한 훈육을 한 것인데 이를 욕설과 발길질로 보답한 학생이 과연 이 나라 학생이 맞는가. 또 그런 학생을 편들어 자기 스승에게 '다구리'를 놓고도 반성은 커녕 돌아서서 아니라고 오리발 내미는 저 자들이 광주의 학생들이 맞는가. 이 땅에 3·1운동의 불씨를 놓고 거룩한 5· 18 민주항쟁의 현장이었던 광주의 학생들이 맞는가. 참으로 개탄스럽다. 

우리때는 안 그랬는데 너희들은 왜 그런가 하고 말해봤자 들을 자들이 아니니 제발 이 글을 그들만은 읽지 말았으면 한다. 벽두에 이 말을 하는 것은 하필 그들도 '3학년 5반' 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의 '3학년 5반'은 별나긴 했어도 그런식으로 막되 먹지는 않았다. 우리 때는 선생님이 때리면 무조건 맞았지 감히 대들거나 눈 한번 치켜 뜨지 못했다. 40년이 지난 지금, 같이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 선생님도 별 수 없는 한 인간에 불과해 보이지만 그 때는 그저 선생님은 신성불가침의 군주 같은 존재였다. 우리가 잘못했을 때는 물론이고 때로는 비교육적인 매질에도 찍소리 못했다.

내가 부산중학교 1학년B반에 다닐 때, 우리 담임도 아닌 별명이 '반티'로 통했던 반모라는 영어선생님이 있었다. 평소 수업시간에 내가 뭘 좀 안다고 안달이 짓을 했던 것 같은데 그 성격 괴팍한 선생이 눈여겨 보고 있는 줄 모르고 그날따라 책상 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려 고개를 숙이는 순간 운 나쁘게 학습태도불량으로 걸렸다. 급우들이 보는 가운데 쪼인대를 까이고 머리를 얻어맞았다. 그것도 모자라 손가락에 연필을 끼우고 짓누르거나 무릎에 교사봉을 끼우고 비트는 고문을 하였다. 학생들은 공포에 질렸고 나는 고통에 질렸다. 이것은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그래도 나는 눈티가 반티가 되도록 패는 대로 맞았는데 세상에 이렇게 비교육적인 교사가 있을 것인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친다. 그는 나의 학습태도가 나쁜데도 성적이 좋은 것은 커닝을 해서일 거라는 소리까지 했다. 그는 수업시간에 누가 숨소리를 크게 내는 것도 싫어한 특이 성격자였다. 덕택에 영어 기초는 탄탄히 배웠지만 40년도 더 지난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훈육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때는 하느님이 때리는 것으로 여겼지 대들거나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 '반티' 선생님이 아직 살아 계신다면 한번 만나 소주라도 하고싶다.


#사기를 친 선생님

이 '반티' 선생님은 특이한 분이셨지만 중학시절 이야기이고,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그런 특이한 분은 내 기억에는 안 계셨다. 18회의 중심이요 화제와 해프닝의 메카인 '3학년 5반'을 이야기 하자면 반원들도 반원들이지만 담임선생님을 빼놓을 수 없다. 아니 '유담뽀' 라는 별명의 유수현 선생님이 안계셨더라면 3학년5반이 그처럼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사제간의 정과 믿음이 두터웠다.

먼저 유 선생님의 프로필을 보자. 경북 청도 출생으로 서울 문리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당시 홍금술 교장의 초빙으로 바로 26세의 젊은 나이에 부산고에 강사자리를 얻어 왔다. 그때가 6회 선배님들 재학시절이 아닌가 싶지만 어쨌든 사회생활의 출발을 부산고에서 시작하여 12년간 봉직하다가 우리 기를 마지막으로 부산대학교로 전출함으로써 평교사직을 마감했다. 그 후, 부산대 법정대 교수, 학장을 역임하다가 경성대 총장직을 마지막으로 지금은 남천동에 한거하고 계시다, 노시느라 바쁘시지만 우리 동기 자녀들의 결혼식 주례 부탁만은 꼭 들어주신다고 한다. 얼마 전 우리 반 김진수군의 장녀 결혼식 주례를 마친 자리에서 털어놓은 말씀이 걸작이다.

"내가 너이 놈들 가르칠 때 그 때 내 나이가 얼만 줄 아나? 삼십대 중반이었는데 그 때 내가 뭘 알았겠노? 내가 사기 친 줄은 몰랐제? 너그들 내한테 사기 많이 당했다. 요놈들, 사기 쳐묵은 재미가 을매나 재미있었는 줄 모를 끼다.

인자 같이 늙어 가는데 사제간에 무신 허물이 있겠노? 늙어 보니 세상에 제일 좋은기 친구 우정인 기라. 사회에 나와서 만난 친구는 잘 친구가 안 되고 암만해도 같은 동창이 최곤기라. 너그들 벌거 아잉 거 가지고 다투지 말고 잘 지내그래이."

노은사의 인간적 체취가 물씬 나는 체험적 고백이다. "사기를 쳤다는 것은 더 잘 가르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는 말씀일 테지만 세월 앞에서는 모든 인생이 무력한 것, 결국 유한한 우리 인생의 한계를 느끼고 늙음과 죽음이라는 이 절대명제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 번 절감한다. 그럴수록 친구와 모교와 은사가 소중하고 그리운 것 아니겠는가. 지금 선생님의 말씀이 어떤 경전보다 귀에 속속 들어오는 것도 우리가 나이가 들었다는 반증일게다. 그러니 청조인들이여! 너나 없이 잘 지내자. 이제 정말로 얼마 안 남지 않았는가. 벌써 우리 동기 중에는 죽은 놈도 많다. 뒤에 나오 겠지만 우리 5반의 7대 명물 중 하나인 상욱이는 일찍 인생에 회의를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최영승이, 김호준이, 김정윤이는 다 암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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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똥이 되라

이제 그 별난 3학년5반의 교실로 가보자. 바다를 발아래 깔고 있는 부산고는 원래 목조건물 2동(전관과 후관)뿐이었다. 우리 때  2~3년 전부터 모교의 트레이드마크격인 전관은 홈클래스가 아닌 특수목적으로만 사용하였고 후관만 교실로 썼다. 재정이 어려워 후관 옆대기에 콘크리트 건물을 신축, 신구(新舊) 건물을 잇대어 양쪽을 터놓았다. 1반에서 4반까지는 콘크리트로 지은 새 건물에 있었고, 5반에서 8반까지는 구건물, 즉 삐걱 거리는 목조건물 3층에 있었는데, 5반이 바로 그 연결통로에 있어 항상 거래의 중심에 있었다. 그래서 5반을 이야기하면 18회 8개 반 모두를 이야기하는 셈이 된다. 이 건물은 우리 졸업 후 3년만에 화재로 망실되었다고 한다. 화재가 아니었더라도 시대의 물결에 헐렸겠지만 이제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린 그래서 지금 50대 이상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그 나무 교실을 그리워한다.

5반에는 천재와 둔재, 충신과 골통들이 다 모여 있어서 내 기억력이 문제지 사건과 화제는 얼마든지 있었다. 앞으로 여러 대목에서 실명(實名)이 나오더라도 거명되는 사람은 5반 출신답게 영광(?)으로 생각해주기 바라며, 선후배들께서는 그 시절이라면 누구나 겪는 비슷한 상황임을 짐작하여 재미있게 읽어 주시기 바란다. 인생이란 어차피 유한한 기억의 사과를 꺼내 먹다 가는 존재가 아니던가. 갈수록 화석화되어 가는 기억의 편린들을 들추어 남음이 있다면 누구든 이 글이 진행되는 도중에라도 그때그때 제보를 해 주시면 고맙겠다. 

우리는 1962년에 입학하여 1965년에 졸업한 520명중에서 재적 68명으로 편성되었다. 우리 학번은 입학시에는 8학급 480명이었는데, 사대부고가 폐교되면서 그 학생 중 40여명이 편입되어 학생수가 늘어났다. 어떤 기준으로 누가 반을 짰는지는 모르나, 반원들 면면이 개성적이고 특이한 면이 있었고, 그러한 개성들은 앞서 소개한 명강의 영어선생이자 위대한 '똥의 대가' 유수현(柳璲鉉) 선생님이 담임을 맡음으로써 물을 만난 고기처럼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공부면에서는 전교 모의고사 1,2,3등을 모조리 석권하기도 했고, 정학을 비롯한 문제아 최다보유, 교내 스트라이크 주동 및 반동세력의 혼재, 모대학 최다 진학, 졸업 후 동기회장 최다 배출, 동기회 총무 최장수 집권(?), 반창회 최다 개최 등 화려한 기록을 갖고 있다.

유 선생님은 우리 반을 끝으로 부산고를 떠나셨기에 더이상 고교 제자가 없어 더욱 막내인 우리에게 애착을 갖고 계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뒷날 이야기이고 당시에는 패기만만한 젊은 교사였다. 우리 반은 뒤에 고교 졸업을 앞두고 교내에서는 물론이고 아마 전국에서 전무한 일이라 할 반지(班誌)를 졸업기념으로 제작·배포하여 크게 물의(?)를 일으켰다. 앞서 광주 K고와는 질적으로 다른 물의다. 그 '유수'라는 題名의 학급지는 급우 전원과 당시 3학년 수업담당 전 선생님들의 앙케이트를 수록한 문예지였는데, 그 중 '학급일지'의 기록을 보면.

「 3월 2일, 3의 5 구성되다 "거대한 똥이 되라" - 유수현 군 연두교서 반장 김장섭, 부반장 정순길, 만장일치로 당선되다 - 짝짝짝 」

라고 되어 있다. 담임선생을 굳이 군(君)' 이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를 '똥'으로 격하하여 부르는데 대한 학생들의 반격이었다. 유 선생님은 입만 열었다 하면 '똥' 이야기였다.

"영고이, 정고이, 규화이, 상태, 상우기, 상주이, 승화! 얼굴이 벌거무리~하이 해가지고 대체로 똥이다! 무신 소린지 논쪼 알겐나?" 하고 그 작은 눈을 빛내며 악을 쓰면 우리는 겁을 내는 척 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무도 겁을 내지 않았다.

그 말의 이면에 담고 있는 의미를 모두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 제자들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다 담고 있는 말이 바로 '똥' 이었던 것이다. 여기 나오는 여덟 명 ('영고이'는 김영곤과 정영곤 2명임)은 유 선생님을 가장 많이 괴롭힌(?) 대가로 가장 큰 사랑(?)을 받던 요주의 인물들이다. 그리고 "영고... "운운은 마치 북한 에서 "위대한 수령···. "같이 외치는 구호처럼 1년 내내 교탁 에서 입만 열면 터져 나오는 상투어였다. 하도 들어 근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특유의 액센트와 가락이 잊었던 유행가처럼 한입에 달려나온다. 참으로 그리운 이름이요, 그리운 시절이다. 당시 유 선생님의 마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글이있다. 바로 그 유수 지에 실린 자필 권두사를 보자.

"내 반(5반) '싱기비'들이 주체세력이 되어서 '개묵띠이' 같은 것을 만드는 모양인데, 똥 같은 놈들 손으로 만드는 거라 '구린내'도 약간 난다. 당초에는 냄새도 나고 해서 가까이 하지 않고 피하면서 옆 눈으로 살짝살짝 살펴보니 못된 놈들 몇몇이 작당한 것이 아니라 반 전체가 혼연일체가 되어 숨소리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서 아차! 하고 '청진기' 를 살짝 안 가슴에 대어본 즉, 이미 발병! 열이 최고 39도를 오르내리는 판국이라 아연! 나도 해열처방을 해야겠다고 '대표 싱기비'에게 권두산지 뚱딴진지를 쓰겠다고 나서게 되었다. 피상적 관찰자(?)들은 담임 선생까지 '대표 최고위원'이 되어서 전에 없던 장난을 한다고 빈축은 몰라도 '갸우뚱'은 할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전에 없던 장난이라. 그러나, 병은 났고 나발은 벌어졌으니 좋다! 한번 해 봐라! 1964년 12. 1 유수현"

이 얼마나 멋진 권두사인가. 근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썩지 않고 그 똥냄새가 모락모락 나는 것 같지 않은가. 유 선생님은 우리를 들소처럼 노는대로 놔두었다가 옆길로 새거나 어정대는 놈이 있으면 가차없이 야단을 치지만 제 길을 가고 있는 한 간섭이 없으셨고 자율대로 내버려두셨다.

3월 어느 날, 수업 중에 박00를 강타하신 적이 있는데, 그 때는 신학기초라 군기(?)를 잡을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 엄한 모습을 본 우리 반 아이들은 학년 내내 '마른 장작도 불붙으면 무섭다'는 진리와 '매는 사랑보다 엄치 낫다'는 페스탈로치의 개정판(?) 가르침을 실감하였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잠시 짚어보자. 당시 유 선생님은 우리 같은 양반 학생(?)을 만났기에 망정이지 만약 저 무지막지한 광주의 K 고 3학년 5반 학생들을 만났더라면 뭐가 탈이 나도 나고 말 았을 것이다. 이 점 통촉해 주셨으면 한다.


#누가 누가 모였나

당시 재학생의 구성을 보면, 한 교문을 쓰고 있던 부산중학 출신들이 반수 정도를 차지하였고, 나머지는 부산시내 타 중학의 우등생이나 경남 일원의 도시와 농촌에서 유학 온 소위 천재니, 신동이니 하는 말을 듣던 우수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인근 명문인 경남중학에서도 더러 왔지만 많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촌놈들이 많았던 것은 선후배기와 비슷하였다. 우리 반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였는데 이 자리에서 그 족보를 다 밝힐 수는 없고 그 구성원들을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다음 호에 계속)

 『청조인』 2001년 5월(1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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