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부터 2001년 4월호부터 연재되어 동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박구하 동문 (18회)의 '그때 그시절, 그리운 이야기들- 청조만담'을 리바이벌 연재합니다.
박동문은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한일은행, 부산은행 지점장, (주)기아인터트레이드 대표이사를 역임했으며, 한국시 신인상, 시조문학 추천 등단 후 계간 '시조문학' 편집인을 지내던 중 2008년 작고하셨다.
(편집자주)
#바다, 그 영원한 모성
내 귀는 소라껍질! 그리운 바다의 물결소리여
장• 꼭토의 '귀'라는 시를 떠올리며 나는 지금 떠나온 바다, 십대의 바다, 교정 벤치에서 바라보던 그 순수의 바다를 생각한다. 모든 것을 수용하면서도 질서를 잃지 않고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는 古典의 바다, 폭풍에 나울치다가도 다시 평온을 되찾는 수평의 바다, 공부가 안될 때나 실의에 빠졌을 때, 바다는 먼 해조음으로 다가와 지친 마음을 달래 주었다. 실로 바다는 우리 부고인의 영원한 모성이요, 그리움의 본산이다.
우리는 비좁은 초량 언덕길을 3~6 년간 오르내리며 눈만 들면 보이던 초록빛 바다. 있을 땐 잘 몰랐던 바다의 존재, 모든 가능성을 안고 출렁이던 靑潮의 바다를 죽도록 잊지 못한다. 물 들면 다섯이요. 물 나면 여섯이 되는 신기한 오륙도가 코앞에 보이고 오동나무, 미류나무 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던 풍경들, 먼 이국에서 달려와 창검 같은 꽃대들을 치켜들고 정박하고 있는 뭇 기선들은 또 얼마나 우 리들의 젊은 가슴을 뛰게 하였던가.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따로따로 살고 있지만, 누구든 이 교문을 나온 사람이면 아슴푸레한 그 기억의 바다를 잊지 못한다.
'기억의 끈을 이어 전류처럼 흐르다/ 함께 가진 것이 많아 차라리 슬프다'는 유자효 시인(19회)의 '재회' 라는 시처럼, 정신의 연골이 여물고 육체가 눈뜨는 인생의 여명기에 우리의 뇌리에 하나하나 새겨진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이 영상들은 이제는 그 교정을 함께 했던 동창 선후배가 아니면 되찾을 수가 없다. 그 바다가 어디 가는 것도, 모교가 자리를 옮기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 때 그 시간을 그 자리에서 함께 한 추억의 동위원소를 공유하고 있는 학우가 없고서야 무슨 감흥과 흥취 있으랴. 우리는 남달리 청춘의 씨앗이 여물어가던 시기에 그 바다를 공유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복이요, 큰 인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그 바다가 보이는 교정에서 벌어졌던 이바구들을 찾아가려 한다. 망망대해에서 바늘귀를 찾는 심정으로 옛 기억들을 하나씩 더듬어 이 글을 쓰려고 한다. 그 많은 이야기를 제대로 쓸 수 있을까 생각하면 다시 아득해지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다. 이바구는 아무래도 내가 속했던 3학년 5반을 중심으로 시작해야겠다.

[제1화] 3학년 5반 별난 아이들
#20년 후의 약속
지난 1월 26일 저녁. 나는 누구를 배웅하기 위하여 올림픽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무어라고 지껄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이정욱 총무의 다급한 목소리. "김정윤이가 갔다. 내일이 발인이니 강남성모병원으로 오라"고 한다. 나는 뒤통수를 맞은 듯 "정윤이가 가다니 무슨 소리야. 정윤이라니 어느 정윤이 말인데?" 하고 어지럽게 되물었다. 그러자, "어당, 우당하는 김정윤이 말이다. 그가 죽었다 안카나" 하고 다소 술끼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동기에 김정윤이는 둘이 있다. 김정윤이는 죽을 수 없는 친구다. 그가 죽다니 말도 안 된다.
나는 김포공항에 그를 내려다 주고는 강변 올림픽대로를 되짚어 달렸다. 차창밖에는 눈보라가 치고 있었고 강추위에 한강은 얼어붙어 있었다. 올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고 기온도 영하 16도를 오르내리며 노숙자와 없는 자를 울렸다. 날씨만큼 내 머리는 얼어붙고 갈피를 못 잡겠는데 마음만 바빴다.
그와는 부산중고를 같이 다니며 한 반에 짝지까지 같이한 사이다. 우리가 남달리 가까웠던 것은 둘만의 비밀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학시절 오• 헨리의 '20년후(After Twenty Years)' 라는 단편을 읽고 그 소설에 나오는 두 주인공이 20년 후 형사와 범인으로 재회한다는 스토리를 흉내내어 졸업후 20년째의 만우절 날 부산 용두산공원 4• 19탑 앞에서 만나자고 약조를 하였다. 그 후 우리는 서울로 올라와 학교는 다르지만 혜화동에서 4년간 (드나듬은 있었지만) 하숙을 같이 하였고 대학 졸업 후 나는 H은행에 그는 S물산에 입사하여 꾸준히 만나 우정을 확인하고는 하였다. 세월은 흘러 우리는 범인도 형사도 못 된 몸으로 늘 알만한 위치에서 어정대고 있었다.
은근히 기대(?)했던 신분의 격차 같은 극적인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만 20년이 되는 1985년 그날에는 마침 그가 동기회장으로 있었고 같은 서울에 있을 때라 일부러 부산까지 가서 만날 필요가 없어 서초동에서 그가 경영하던 "미노"라는 일식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옛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다음 20년 후에는 서울 남산 팔각정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런 그가 가다니.
#눈물의 동창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반포대교 램프를 빠져 나와 성모병원으로 들어갔다. 주차표를 받고(세상에! 나갈 때 주차비가 7천원이나 되었다) 영안실로 들어가니 동기생들이 한방 가득하였다. 빈소에서 미망인을 보니 비로소 '이것은 사실이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국화 한 송이를 올리고 향불을 사르고 묵념을 하는데 희한이 가슴을 찔렀다. 잠시 상주의 손을 잡아주고 빈청으로 가니 모두들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정작 고인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와 친했던 이헌일군도 얼마 전 큰 병으로 일본에까지 가서 수술을 받고 왔다고 하는데 이미 거나해 보이는데도 주는 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래도 끝까지 정윤이의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모두들 내심 허망해 하면서도 친구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무슨 동창회를 하듯 이 죽음과는 무관한 자신들의 직장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마시고 떠들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는 주로 듣는 입장으로 잔만 기울였다. 골프를 치며 스코어를 다투던 일,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을 때 위로해 주던 말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는 늘 꿋꿋하고 성실하니 내가 걱정할 일이 별로 없었고, 언제나 연락만 하면 만날 수 있겠기에 자주 찾지 않았던 것인데 친구가 병에 걸려 투병중인 것도 몰랐으니 나는 친구라 할 수도 없다는 자책감에 빠졌다. 몇 해 전 괌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횡사한 홍성현(KBS 보도본부장)군이 생각났다. 황당하기로 말하면 홍 군 쪽이 더 하다. 누구의 뜻인지 가족을 반으로 갈라 유명을 달리하게 만든 그 엄청난 비극을 다시 한번 애도한다.
친구는 하나둘 사라지는데 그 죽음 앞에서 내가 할 일이 별로 없다는 게 놀라웠다. 늦게 자리를 털고 집으로 돌아와 이런 저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영안실에서 박우진 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영결식에서 읽을 동기회 이름으로 된 추모사가 필요한데 의논 끝에 나온 결론이라며 나더러 꼭 쓰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밤을 새울 모양이었는데 혼자 편히 자는 것도 그렇고 하여 자정 넘어 끙끙대며 글을 썼다. 초고를 써서 퇴고를 하다보니 어느새 새벽이 다 되었다. 영결식 1시간 전에 병원으로 팩스를 넣어 추모사를 보내고는 쓰러졌다. 20년만에 만나기로 한 친구가 바로 그가 찾는 범인인 줄을 알고 차마 제 손으로 체포할 수 없어 빙빙 돌다 동료형사를 대신 보냈던 소설 속 이야기처럼 나는 추모사를 쓰기는 썼으나 차마 내 입으로 읽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나는 피로하거나 잠을 못 자면 눈알이 아픈 증세가 있다. 눈알이 빠지도록 아픈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영결식에도, 장지에도 나는 따라가지 못했다.
그날 영결식장에는 18회 동기생만 100여명이 참석하였다는데 이는 근래 동기들 모임으로는 최대였다. 영결식장은 바로 동창회장이었다. 추모사는 동기회장 김창규(치과의사)가 읽었는데 읽는 이도 듣는 이도 모두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 일부를 옮겨본다.
.... 이 추운 겨울이 가고 꽃피는 봄이 오면 어디서 그대의 홍조 띤 얼굴과 꿈꾸는 눈동자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인가. 자식은 만들어도 형제는 못 만든다는데 한 학교, 한 교실에서 뒹굴며 그때 그 시절,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한 우리 친구들이야말로 무엇으로 또 만들 수 있으리. 세월 갈수록 고향이 그리워지듯 친구는 더욱 소중한 것, 다시 만들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우정이 아닌가.
그 소중한 우정 하나를 그대 오늘 기어코 가지고 가버려야겠는가. 너무나 슬프고 너무도 억울하여 우리는 밤을 새워 그대를 생각하며 술을 마셨네. 마셔도 마셔도 취기는 간데 없고 허기만 가슴에 차네. 그대 잔에 술을 채워도 비우지 못하는 그대여! 그대 50대의 억울한 나이를 어느 누가 대신하리.
친구여, 친구여, 아름다운 우리 친구 정윤이여!
그대를 생각하며 우리 모두 마지막 그대 가는 길에 오늘 여기 모였다네. 그대의 못다 한 일들을 우리 어찌 대신하랴만 우리 남은 동창 친구들, 더욱 가깝게 지내며 늘 하던 대로 달마다 모여 그대 고운 이름 떠올리며 세세년년 함께 살려 하네. 부디 부디 잘 가시게....
어쨌든 이 눈물의 추모사가 고인을 보내고 남은 우리들에게 서로의 연대의식을 재확인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면 하나의 위안일 수 있다. 장례후 한 달만에 '우당'(방이동)에서 가진 모임에는 평소보다 많은 동기들이 나왔는데 그날의 추모사에 대한 소감을 묻는 자리에서 나는 "그 글은 내가 쓴 게 아니고 정윤이의 혼이 내게로 와서 쓴 것"이라 고 말했다. 그 글은 지금 읽어도 콧날이 시큰해진다. 이제 그는 가고 없으니 그와 나의 치기 어린 20년 후의 약속'도 끝장이 났다.
잠시의 방심으로 그는 그가 사랑한 모든 것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의 잘못인가, 그가 믿는 천주님의 뜻인가.
#프롤로그
'청조 만담'이라 해놓고 대뜸 초상 치른 이야기부터 꺼내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동기와 선후배라는 동창관계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함께 생각해보고 싶어서다. 동기와 선후배란 우리의 생명처럼 한번 맺어지면 다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특정의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하였다는 인연이란 한없이 소중하고 귀한 것이다.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친구, 그 중에서도 동기나 동창 선후배만큼 든든한 것은 없을 것이다. 현역으로 맹활동 중인 젊은 후배들은 모르겠으나 세상을 살만큼 산(?) 오십대 이후 동문들은 죽음 문제를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다. 이제는 자꾸 주위에서 떠난다는 소리뿐 부활이나 재생의 소식은 없으니까. 젊을 때 경쟁하고 다툰 만큼 늙어서 고맙고 소중한 지우는 없다.
한사람씩 떠나면 잔류자가 받는 스트레스는 만만치 않다.
18회를 전후한 기수들은 소위 '낀 세대'로서 IMF의 직격탄을 바로 맞아 유난히 '젊은 노인'이 많고, 달리는 열차에서 강제로 떼밀려난 희생자가 많다. 해방전후에 태어나 전쟁과 폐허에서 맨발로 뛰던 유년시절, 우리는 선배들을 따라 보릿고개를 넘어왔고, 청장년시절 새마을운동과 개발에 앞장섰으면서도 아무런 보상도 없이 '늘 앞에 치이고 뒤에 받치며' 부패한 정권과 무능한 관료들 때문에 생업을 빼앗기고 시대의 현장에서 쫓겨난 불행한 세대이다. 重厚長大의 '굴뚝문화'에 익숙한 우리는 輕薄短小의 '정보문화'에는 굼뜰 수밖에 없어 어디가나 불청객이 되었다. 아직 젊은 후배들이나 유능하여 현직에 있는 동기생, 선배들은 실감치 못할는지 모르나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이 고독과 소외감을 떨치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어떤 의미가 되는 존재가 되고 싶다. 그렇지 않고는 외로워서 살 수 없고, 서러워서 죽을 수가 없다.
지나간 세월은 다시 불러올 수 없기에 그립고 소중한 것. 우리는 매일매일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이제는 친구가 죽는 것도 우리 책임이다. 바람이 부는 날까지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오늘날 다양성의 사회에서 40대의 황퇴(황당한 퇴직), 50대의 명퇴(명백한 퇴직), 60대의 은퇴(은근한 퇴직)는 너무 빠르고 억울하다. 지나간 것을 돌아본다거나 과거에 집착하는 하는 것은 퇴영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뿌리를 돌아보고 정신의 고향을 확실히 함은 미래를 위해 소중한 것이다. 학창시절을 회고하며 그 소중한 기억을 일깨워 드러냄으로써 동심으로 돌아가 꺼진 불도 다시 보는 심정으로 식은 우정을 되살리고 지켜나가자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최대의 목적이다.
돌아보면 아스라이 36년 전 이야기지만 아직도 모든 것 이 어제처럼 생생한 나날들이다. 바로 고개만 돌려도 거기 그 자리에 한 반 아이들이 웃고 떠들고 있을 것만 같고, 그 때의 교사와 소품들이 다 그대로 있을 것 같은데 실제는 없고, 무슨 말을 해도 금방 다 기억이 날 것 같은데 막상 끄집 어내자면 잘 생각나지 않는 나이가 안타깝다.
처음 연재형식의 청탁을 받고 어림없는 일이라고 손을 내둘렀지만 계속되는 압박(?)에 펜을 잡고 말았다. 재학시 문예반에 있었고, 재주 없음에도 늘 문학의 한 귀퉁이를 기웃거리다가 늦깎이로 시를 쓴다고 등단을 하게 된 것이 여기까지 오게된 전말이다. 등단 후 여기 저기 들어오는 글 청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응하다 보니 이제는 엉터리 글이라도 읽어주는 독자까지 생겨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동기회다. 무슨 전속 대필가라도 만난 양 축시, 조사, 기행문, 행사기, 등등 하다못해 무슨 감사패 문안 쓰는 데까지 삐끗하면 나를 불러 종 부리듯(?) 글을 쓰라고 야단들이다. 기분이야 나쁘지만 (실은 그리 나쁜 것만 아니어서) 이제는 못 이기는 체 이 짓을 하고 있다.
『청조인』 2001년 4월(145호)
이번호부터 2001년 4월호부터 연재되어 동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박구하 동문 (18회)의 '그때 그시절, 그리운 이야기들- 청조만담'을 리바이벌 연재합니다.
박동문은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한일은행, 부산은행 지점장, (주)기아인터트레이드 대표이사를 역임했으며, 한국시 신인상, 시조문학 추천 등단 후 계간 '시조문학' 편집인을 지내던 중 2008년 작고하셨다.
(편집자주)
#바다, 그 영원한 모성
내 귀는 소라껍질! 그리운 바다의 물결소리여
장• 꼭토의 '귀'라는 시를 떠올리며 나는 지금 떠나온 바다, 십대의 바다, 교정 벤치에서 바라보던 그 순수의 바다를 생각한다. 모든 것을 수용하면서도 질서를 잃지 않고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는 古典의 바다, 폭풍에 나울치다가도 다시 평온을 되찾는 수평의 바다, 공부가 안될 때나 실의에 빠졌을 때, 바다는 먼 해조음으로 다가와 지친 마음을 달래 주었다. 실로 바다는 우리 부고인의 영원한 모성이요, 그리움의 본산이다.
우리는 비좁은 초량 언덕길을 3~6 년간 오르내리며 눈만 들면 보이던 초록빛 바다. 있을 땐 잘 몰랐던 바다의 존재, 모든 가능성을 안고 출렁이던 靑潮의 바다를 죽도록 잊지 못한다. 물 들면 다섯이요. 물 나면 여섯이 되는 신기한 오륙도가 코앞에 보이고 오동나무, 미류나무 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던 풍경들, 먼 이국에서 달려와 창검 같은 꽃대들을 치켜들고 정박하고 있는 뭇 기선들은 또 얼마나 우 리들의 젊은 가슴을 뛰게 하였던가.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따로따로 살고 있지만, 누구든 이 교문을 나온 사람이면 아슴푸레한 그 기억의 바다를 잊지 못한다.
'기억의 끈을 이어 전류처럼 흐르다/ 함께 가진 것이 많아 차라리 슬프다'는 유자효 시인(19회)의 '재회' 라는 시처럼, 정신의 연골이 여물고 육체가 눈뜨는 인생의 여명기에 우리의 뇌리에 하나하나 새겨진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이 영상들은 이제는 그 교정을 함께 했던 동창 선후배가 아니면 되찾을 수가 없다. 그 바다가 어디 가는 것도, 모교가 자리를 옮기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 때 그 시간을 그 자리에서 함께 한 추억의 동위원소를 공유하고 있는 학우가 없고서야 무슨 감흥과 흥취 있으랴. 우리는 남달리 청춘의 씨앗이 여물어가던 시기에 그 바다를 공유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복이요, 큰 인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그 바다가 보이는 교정에서 벌어졌던 이바구들을 찾아가려 한다. 망망대해에서 바늘귀를 찾는 심정으로 옛 기억들을 하나씩 더듬어 이 글을 쓰려고 한다. 그 많은 이야기를 제대로 쓸 수 있을까 생각하면 다시 아득해지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다. 이바구는 아무래도 내가 속했던 3학년 5반을 중심으로 시작해야겠다.
[제1화] 3학년 5반 별난 아이들
#20년 후의 약속
지난 1월 26일 저녁. 나는 누구를 배웅하기 위하여 올림픽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무어라고 지껄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이정욱 총무의 다급한 목소리. "김정윤이가 갔다. 내일이 발인이니 강남성모병원으로 오라"고 한다. 나는 뒤통수를 맞은 듯 "정윤이가 가다니 무슨 소리야. 정윤이라니 어느 정윤이 말인데?" 하고 어지럽게 되물었다. 그러자, "어당, 우당하는 김정윤이 말이다. 그가 죽었다 안카나" 하고 다소 술끼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동기에 김정윤이는 둘이 있다. 김정윤이는 죽을 수 없는 친구다. 그가 죽다니 말도 안 된다.
나는 김포공항에 그를 내려다 주고는 강변 올림픽대로를 되짚어 달렸다. 차창밖에는 눈보라가 치고 있었고 강추위에 한강은 얼어붙어 있었다. 올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고 기온도 영하 16도를 오르내리며 노숙자와 없는 자를 울렸다. 날씨만큼 내 머리는 얼어붙고 갈피를 못 잡겠는데 마음만 바빴다.
그와는 부산중고를 같이 다니며 한 반에 짝지까지 같이한 사이다. 우리가 남달리 가까웠던 것은 둘만의 비밀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학시절 오• 헨리의 '20년후(After Twenty Years)' 라는 단편을 읽고 그 소설에 나오는 두 주인공이 20년 후 형사와 범인으로 재회한다는 스토리를 흉내내어 졸업후 20년째의 만우절 날 부산 용두산공원 4• 19탑 앞에서 만나자고 약조를 하였다. 그 후 우리는 서울로 올라와 학교는 다르지만 혜화동에서 4년간 (드나듬은 있었지만) 하숙을 같이 하였고 대학 졸업 후 나는 H은행에 그는 S물산에 입사하여 꾸준히 만나 우정을 확인하고는 하였다. 세월은 흘러 우리는 범인도 형사도 못 된 몸으로 늘 알만한 위치에서 어정대고 있었다.
은근히 기대(?)했던 신분의 격차 같은 극적인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만 20년이 되는 1985년 그날에는 마침 그가 동기회장으로 있었고 같은 서울에 있을 때라 일부러 부산까지 가서 만날 필요가 없어 서초동에서 그가 경영하던 "미노"라는 일식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옛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다음 20년 후에는 서울 남산 팔각정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런 그가 가다니.
#눈물의 동창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반포대교 램프를 빠져 나와 성모병원으로 들어갔다. 주차표를 받고(세상에! 나갈 때 주차비가 7천원이나 되었다) 영안실로 들어가니 동기생들이 한방 가득하였다. 빈소에서 미망인을 보니 비로소 '이것은 사실이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국화 한 송이를 올리고 향불을 사르고 묵념을 하는데 희한이 가슴을 찔렀다. 잠시 상주의 손을 잡아주고 빈청으로 가니 모두들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정작 고인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와 친했던 이헌일군도 얼마 전 큰 병으로 일본에까지 가서 수술을 받고 왔다고 하는데 이미 거나해 보이는데도 주는 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래도 끝까지 정윤이의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모두들 내심 허망해 하면서도 친구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무슨 동창회를 하듯 이 죽음과는 무관한 자신들의 직장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마시고 떠들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는 주로 듣는 입장으로 잔만 기울였다. 골프를 치며 스코어를 다투던 일,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을 때 위로해 주던 말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는 늘 꿋꿋하고 성실하니 내가 걱정할 일이 별로 없었고, 언제나 연락만 하면 만날 수 있겠기에 자주 찾지 않았던 것인데 친구가 병에 걸려 투병중인 것도 몰랐으니 나는 친구라 할 수도 없다는 자책감에 빠졌다. 몇 해 전 괌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횡사한 홍성현(KBS 보도본부장)군이 생각났다. 황당하기로 말하면 홍 군 쪽이 더 하다. 누구의 뜻인지 가족을 반으로 갈라 유명을 달리하게 만든 그 엄청난 비극을 다시 한번 애도한다.
친구는 하나둘 사라지는데 그 죽음 앞에서 내가 할 일이 별로 없다는 게 놀라웠다. 늦게 자리를 털고 집으로 돌아와 이런 저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영안실에서 박우진 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영결식에서 읽을 동기회 이름으로 된 추모사가 필요한데 의논 끝에 나온 결론이라며 나더러 꼭 쓰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밤을 새울 모양이었는데 혼자 편히 자는 것도 그렇고 하여 자정 넘어 끙끙대며 글을 썼다. 초고를 써서 퇴고를 하다보니 어느새 새벽이 다 되었다. 영결식 1시간 전에 병원으로 팩스를 넣어 추모사를 보내고는 쓰러졌다. 20년만에 만나기로 한 친구가 바로 그가 찾는 범인인 줄을 알고 차마 제 손으로 체포할 수 없어 빙빙 돌다 동료형사를 대신 보냈던 소설 속 이야기처럼 나는 추모사를 쓰기는 썼으나 차마 내 입으로 읽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나는 피로하거나 잠을 못 자면 눈알이 아픈 증세가 있다. 눈알이 빠지도록 아픈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영결식에도, 장지에도 나는 따라가지 못했다.
그날 영결식장에는 18회 동기생만 100여명이 참석하였다는데 이는 근래 동기들 모임으로는 최대였다. 영결식장은 바로 동창회장이었다. 추모사는 동기회장 김창규(치과의사)가 읽었는데 읽는 이도 듣는 이도 모두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 일부를 옮겨본다.
.... 이 추운 겨울이 가고 꽃피는 봄이 오면 어디서 그대의 홍조 띤 얼굴과 꿈꾸는 눈동자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인가. 자식은 만들어도 형제는 못 만든다는데 한 학교, 한 교실에서 뒹굴며 그때 그 시절,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한 우리 친구들이야말로 무엇으로 또 만들 수 있으리. 세월 갈수록 고향이 그리워지듯 친구는 더욱 소중한 것, 다시 만들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우정이 아닌가.
그 소중한 우정 하나를 그대 오늘 기어코 가지고 가버려야겠는가. 너무나 슬프고 너무도 억울하여 우리는 밤을 새워 그대를 생각하며 술을 마셨네. 마셔도 마셔도 취기는 간데 없고 허기만 가슴에 차네. 그대 잔에 술을 채워도 비우지 못하는 그대여! 그대 50대의 억울한 나이를 어느 누가 대신하리.
친구여, 친구여, 아름다운 우리 친구 정윤이여!
그대를 생각하며 우리 모두 마지막 그대 가는 길에 오늘 여기 모였다네. 그대의 못다 한 일들을 우리 어찌 대신하랴만 우리 남은 동창 친구들, 더욱 가깝게 지내며 늘 하던 대로 달마다 모여 그대 고운 이름 떠올리며 세세년년 함께 살려 하네. 부디 부디 잘 가시게....
어쨌든 이 눈물의 추모사가 고인을 보내고 남은 우리들에게 서로의 연대의식을 재확인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면 하나의 위안일 수 있다. 장례후 한 달만에 '우당'(방이동)에서 가진 모임에는 평소보다 많은 동기들이 나왔는데 그날의 추모사에 대한 소감을 묻는 자리에서 나는 "그 글은 내가 쓴 게 아니고 정윤이의 혼이 내게로 와서 쓴 것"이라 고 말했다. 그 글은 지금 읽어도 콧날이 시큰해진다. 이제 그는 가고 없으니 그와 나의 치기 어린 20년 후의 약속'도 끝장이 났다.
잠시의 방심으로 그는 그가 사랑한 모든 것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의 잘못인가, 그가 믿는 천주님의 뜻인가.
#프롤로그
'청조 만담'이라 해놓고 대뜸 초상 치른 이야기부터 꺼내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동기와 선후배라는 동창관계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함께 생각해보고 싶어서다. 동기와 선후배란 우리의 생명처럼 한번 맺어지면 다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특정의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하였다는 인연이란 한없이 소중하고 귀한 것이다.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친구, 그 중에서도 동기나 동창 선후배만큼 든든한 것은 없을 것이다. 현역으로 맹활동 중인 젊은 후배들은 모르겠으나 세상을 살만큼 산(?) 오십대 이후 동문들은 죽음 문제를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다. 이제는 자꾸 주위에서 떠난다는 소리뿐 부활이나 재생의 소식은 없으니까. 젊을 때 경쟁하고 다툰 만큼 늙어서 고맙고 소중한 지우는 없다.
한사람씩 떠나면 잔류자가 받는 스트레스는 만만치 않다.
18회를 전후한 기수들은 소위 '낀 세대'로서 IMF의 직격탄을 바로 맞아 유난히 '젊은 노인'이 많고, 달리는 열차에서 강제로 떼밀려난 희생자가 많다. 해방전후에 태어나 전쟁과 폐허에서 맨발로 뛰던 유년시절, 우리는 선배들을 따라 보릿고개를 넘어왔고, 청장년시절 새마을운동과 개발에 앞장섰으면서도 아무런 보상도 없이 '늘 앞에 치이고 뒤에 받치며' 부패한 정권과 무능한 관료들 때문에 생업을 빼앗기고 시대의 현장에서 쫓겨난 불행한 세대이다. 重厚長大의 '굴뚝문화'에 익숙한 우리는 輕薄短小의 '정보문화'에는 굼뜰 수밖에 없어 어디가나 불청객이 되었다. 아직 젊은 후배들이나 유능하여 현직에 있는 동기생, 선배들은 실감치 못할는지 모르나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이 고독과 소외감을 떨치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어떤 의미가 되는 존재가 되고 싶다. 그렇지 않고는 외로워서 살 수 없고, 서러워서 죽을 수가 없다.
지나간 세월은 다시 불러올 수 없기에 그립고 소중한 것. 우리는 매일매일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이제는 친구가 죽는 것도 우리 책임이다. 바람이 부는 날까지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오늘날 다양성의 사회에서 40대의 황퇴(황당한 퇴직), 50대의 명퇴(명백한 퇴직), 60대의 은퇴(은근한 퇴직)는 너무 빠르고 억울하다. 지나간 것을 돌아본다거나 과거에 집착하는 하는 것은 퇴영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뿌리를 돌아보고 정신의 고향을 확실히 함은 미래를 위해 소중한 것이다. 학창시절을 회고하며 그 소중한 기억을 일깨워 드러냄으로써 동심으로 돌아가 꺼진 불도 다시 보는 심정으로 식은 우정을 되살리고 지켜나가자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최대의 목적이다.
돌아보면 아스라이 36년 전 이야기지만 아직도 모든 것 이 어제처럼 생생한 나날들이다. 바로 고개만 돌려도 거기 그 자리에 한 반 아이들이 웃고 떠들고 있을 것만 같고, 그 때의 교사와 소품들이 다 그대로 있을 것 같은데 실제는 없고, 무슨 말을 해도 금방 다 기억이 날 것 같은데 막상 끄집 어내자면 잘 생각나지 않는 나이가 안타깝다.
처음 연재형식의 청탁을 받고 어림없는 일이라고 손을 내둘렀지만 계속되는 압박(?)에 펜을 잡고 말았다. 재학시 문예반에 있었고, 재주 없음에도 늘 문학의 한 귀퉁이를 기웃거리다가 늦깎이로 시를 쓴다고 등단을 하게 된 것이 여기까지 오게된 전말이다. 등단 후 여기 저기 들어오는 글 청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응하다 보니 이제는 엉터리 글이라도 읽어주는 독자까지 생겨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동기회다. 무슨 전속 대필가라도 만난 양 축시, 조사, 기행문, 행사기, 등등 하다못해 무슨 감사패 문안 쓰는 데까지 삐끗하면 나를 불러 종 부리듯(?) 글을 쓰라고 야단들이다. 기분이야 나쁘지만 (실은 그리 나쁜 것만 아니어서) 이제는 못 이기는 체 이 짓을 하고 있다.
『청조인』 2001년 4월(1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