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조만담[제16화] 학급일지(9)

202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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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역모사건 - 교장 축출 스트라이크


1964년도 학년초에 일어난 최대의 사건은 학교장(추월영) 축출을 위한 학생 스트라이크였다. 이는 아무도 이긴 자가 없는 가슴 아픈 이야기라 꺼내고 싶지 않지만 그 시절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다고 여겨져 아는 대로 사실을 밝힌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휴교까지 불사하면서 현직 학교장을 몰아내려 단체행동을 한 것은 매우 쇼킹한 일이었다. 사실 추 교장은 모교의 야구부를 육성하여 청룡기 첫 우승을 끌어낸 유능한 교장이었으나, 내가 알기로 부산고교 재임 시 세 번이나 학생들로부터 배척받는 데모를 겪은 불행한 교육자다.

그 첫 번째는 1961년 봄 부산고 교장부임을 반대하는 15회 선배 주도의 데모였다. 당시 나는 부산중학 3학년에 다니고 있었는데 교정에서 몸싸움을 하는 부고생들의 데모현장을 직접 목격하였다. 추 교장은 라이벌 학교인 경남고교에서 전근을 오셨는데, 이는 부산고교의 강정룡 교장과 맞트레이드를 한 묘한 인사발령이었다. 당시 강 교장은 원만한 인격자로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는데, 훌륭한 학교장을 경쟁상대인 경남고교에 빼앗기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순수한 애교심에서 발로한 것으로 보여진다. 어쨌든 이 배척 사건은 서슬 푸른 5.16군사쿠테타의 발발로 수면 아래 잠복해 버리고 말았다.


순수한 애교심, 사전 교감 없었던 쿠데타

두 번째는 18회가 주도한 교장배척운동이었다. 이 스트라이크는 명분도 알 수 없고 내용도 잘 모른 채 눈에 안 보이는 누군가가 주도하는 대로 막연한 정의감을 앞세우고 군중심리로 따라간 것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학기초 어느 날 수업을 마치는 사이렌이 울리자마자 여기저기서 와아 하는 소리와 함께 운동장으로 학생들이 몰려나가는 것이 보였다. 우리 반에서도 누군가가 “나가자!” 하고 외치는 소리에 따라 나도 달려나갔다. 하급생들은 물론이고 주동한 우리 3학년에서도 일부 학생회 간부급을 제외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영문도 모른 채 달려나갔다. 나가니 이미 많은 학생들이 교단을 중심으로 몰려나와 있었고 성토를 하던 주동자들이 분기탱천한(?) 학생들을 이끌고 교문 쪽으로 달려나갔다. 그 선봉대는 교문에서 문을 열지 못하게 막아선 주상우 교감과 일부 교사들을 몸으로 밀어내었는데 그 중에는 우리 5반의 김정호 군도 보였다. 그러나, 사전 交感이 없었던 학생들은 통일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고 교내외에서 우왕좌왕했다.

이 일의 발단의 전모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대충 듣기로는 추 교장이 학교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벌이고 있으므로 축출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어쨌거나 우리가 뽑은 학생회(회장 박성출)에서 주관하였으니 학생들은 모두 집행부를 전폭 지지하여 수업을 거부하고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실력 행사를 벌였던 것이다. 그런데, 일은 쉽사리 마무리되지 못하였다. 학생들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자 소요 사태는 계속되었고, 학교측은 급기야 휴교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 입시를 위한 정상 수업이 절박함에도 연일 공부는 아니하고 데모를 하다 보니 “이게 아닌데...” 하는 자성이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자성론은 “공부를 계속하며 투쟁하자”로 발전되어 데모 대열을 이탈하는 학생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다. 거기에는 나도 상당한 몫을 하였는데 우리 주장에 동조하는 자들이 모이자 내가 3학년 5반 교실로 동조자들을 유도했다. 이때부터 3학년 5반 교실이 반대 세력의 모임터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5반 목조교실에 5반이 아닌 아이들이 떼거리로 들락거린 것은 이 때가 처음일 것이다. 개개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다른 반의 김홍식, 우리 반의 정영일, 이정태, 양흥준 등이 동조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여기 모인 애들은 대부분 소위 충신파(?) 아이들이었다. 한참 대책을 의논하고 있는데, 오복근 교육감이 왔다고 하면서 우리와 대화를 원했다. 이미 데모 양상이 학생들간의 의견 차이로 주동파와 반동파로 양분되고 있음을 감지하고 들어온 것이었다. 오 교육감은 얼굴이 훤하게 잘생긴 미남으로서 들어오더니 다짜고짜로, “여러분,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입니다. 둘 더하기 둘은 넷입니다. 넷 더하기 넷은 여덟입니다...” 이런 식으로 끝도 없이 숫자 이야기를 하더니,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모이면 힘이 강해집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은 거센 홍수에도 떠밀려 가지 않고 살아남은 나무와 같습니다. 아무리 거센 홍수가 와도 떠내려가지 않을 줏대와 꿋꿋한 의지를 가진 학생들입니다...” 이런 식으로 설득 겸 격려를 해 주었다. 이는 좋게 말해 격려였지 실은 우리를 더욱 부추겨 반대 의견을 부각, 데모 주동세력을 와해시키려는 저의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우리가 그 격려에 고무된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대학입시가 발등의 불인지라 한시라도 놀고 있기가 불안하였던 것이다. 사실 그때는 서울대에 몇 명이 합격하느나를 가지고 학교의 우열을 가리던 시기였기에 선생이나 학생들 모두 서울대 진학을 위해 눈에 불을 켜던 때였다. 당시 서울대 진학률은 경기고가 1위, 서울고가 2위로 부동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전국 3위 자리를 놓고 부산고와 경복고가 다투던 때였다. 부산고가 경복고를 따돌리고 있어 경복고가 “타도 부산고!”를 외치며 맹렬히 추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들은 위기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주도자나 반대자 모두 순수하였고 각자가 나름대로 애교심과 정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반대자는 소수파지만 명분이 뚜렷하였기에 갈수록 숫자가 늘어났고 추 교장의 혐의(?)사실도 모두 근거 없는 낭설임이 밝혀졌다. 추 교장은 해임되지 않았고 우리는 휴교 중이던 학교에 정상 등교하라는 공중파 방송을 듣고 등교를 하였다. 뚜렷한 증거도 없이 행동을 일으킨 집행부는 손을 들 수밖에 없었고, 결국 명분을 잃어버린 스트라이크는 실패하고 말았다. 세 번째는 내가 졸업한 다음 해에 일어난 일이라 잘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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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 박세형(24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만화학과 교수


학창시절, ‘잊을 수 없는 사건’ 손꼽아

이 사건은 추 교장에게 평생 교직 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일 것이다. 그 때 노교장이 눈물을 찍어내는 모습을 보고 많은 학우들이 민망해 하였다. 당시 단상에 올라 격앙된 목소리로 “...들리는 말대로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내가 만일 하였다면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하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사태는 싱겁게도 용두사미로 진정되었는데, 그 뒤가 문제였다. 데모 도중에 주제넘게(?) 학생회와 상의도 없이 반대 주장을 편 사람들 때문에 스트라이크가 무산되어 버렸으니 그 後果(후과)가 없을 수 없었다. 그 핵심으로 내가 지목되었다. 사실 나는 공부와 투쟁을 병행하자는 것이었지 학생회의 기도를 무산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소위 “XX파”라는 시내 학생 연합 서클 조직에서 테러 대상자(?)로 지목되어 실제로 테러를 당하였다. 학교 한 구석에 불려가 “니가 그리 잘났어? 맛 좀 봐라.” 하는 말과 함께 주먹질을 당하였다. 한창 난타 중에 내가 불려 가는 것을 목격한 급우들이 알려 선생님들이 달려왔고 그들은 달아났다. 맞아 이빨이 흔들리고 피를 흘리는 나에게 훈육선생님은 폭행 학생 이름을 대라고 하였으나 나는 이름을 대지 않았다. (사실은 이름을 몰랐다.) 담임인 유 선생님은 등하교 길에 특별히 조심하라고 당부하였고, 실제로 그러한 세력에 대해 학교측에서 엄중 경고하였기에 더 이상 테러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나는 매우 침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지금 와서 누구를 비난할 생각도 없고 나를 폭행한 학생이 누군지 이제는 기억도 안 난다. 또, 배후 세력이나 학생회에서 그들을 사주하였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이 일에 대하여는 세월이 흘러 나도 잊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 내가 미국에 근무할 때, 워싱턴에 이민 와 있던 이의재(당시 대의원 의장) 군을 만나 그때를 회상하며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다. 이의재 군은 그때 주도 세력으로 나와는 반대의 입장에 있었는데 그도 폭행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아마도 집행부와는 무관한 동조 세력이 그들의 소영웅 심리와 자존심을 구긴 데 대한 화풀이를 한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어쨌든 추 교장 사건은 다른 회기에 비해 별다른 사건(?)이 없었던 우리 18회로서는 최대의 사건이었다. 유수지 앙케이트에 의하면 응답자의 30% 이상이 학창 생활 중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일로서 이 사건을 꼽고 있었다. 당시 학생들이 무얼 알았겠는가? 누군가 소외받은 세력이 학생들의 힘에 의지하여 꾸민 일인지는 몰라도 그 후유증은 너무 컸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하든 행동대로 동원되었던 학생들인 우리들은 양편 모두 순수하였다는 것은 명백하다. 추 교장 선생님은 아직 생존하고 계시는데 백수를 누리시기 바란다.


故 박구하(1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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