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에 웃고 똥에 운 나날들
오늘은 61년 12월 24일. 마지막 방학이 시작되는 날이다. 학급일지도 이제 막장에 다다랐다. 거기에는 대자보로 “와탕카! 남은 37일, 앞으로 나가자! 갔다오면 내 딸 주마아~”라고 적혀 있다. 이제 길고도 짧은 고교 3년은 완전히 역사의 저편으로 묻힌다. 아직 졸업식과 대학입시가 남아 있지만 사실상 공부는 끝났다. 교복을 벗으며 그간 동고동락한 선생님들의 일화와 상투어록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겠다.
당시 수업편성은 1~4반, 5~8반의 2개조로 나뉘어 교사진도 달랐다. 예컨대, 국어에서 1조는 서문경, 2조는 최을림이었고, 영어는 1조 노기석, 2조 유수현. 수학은 강석우, 정진헌… 이런 식이었다.
똥의 미학가 유수현 선생님
“영고이, 정고이, 규화이, 상태, 상우기, 상주이, 승화!! 얼굴이 벌거무리~ 하이 해 가지고 대체로 똥이다. 이넘들아 무신 말인지 논쪼 알겐나, 엉이?” 이것은 유 선생님의 단골 메뉴로 하도 들어서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읊어도 막힘 없이 술술 나온다. 이 ‘영고이’에서 ‘승화’까지는 도레미파솔라시도로 단숨에 나오는데 곡조와 리듬이 선생님 특유의 음색으로 ‘잘도 잘’ 짜여 있다. 여기 거명된 놈들은 (담임의 눈으로 볼 때) 대체로 문제(?)가 있는 놈들이어서 담임은 학급에서 무슨 문제만 생겼다 하면 맨 먼저 이 놈들의 동태부터 살피는 것이었다. 그러면 희한하게도 이들 중에서 답이 나오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고백을 직접 들어보자.
“모도다 똥 같은 놈들이지만 실상 미운 놈은 하나도 없다. 눈앞이 캄캄하도록 호통 벼락을 맞고도 수 분 후에는 언제 그랬더냐 하고 넙띠기 같은 얼굴이 싱글벙글하니 이놈들이 씰개가 있는 놈들인지 없어서 그런 건지 내 진심을 이해해서 그런 건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진짜로 유 선생을 좋아했다. 그 유들유들한 유모어가 좋았고, 정치학과 출신답게 때때로 시대 현실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지성이 좋았고, 영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학습요령에 대해 알기 쉽게 그러나 수준 있게 가르쳐 주고 일본이나 외국에서 시행하는 고급의 시험문제를 직접 타이핑해 와서(그때는 타자기가 귀했다) 나누어주면서 입시에 대비하도록 유의해 주셨다. 당시 암살 당함으로써 더욱 위대해진 케네디 대통령보다 우리는 유 선생님을 더 존경하였다.
언젠가 ‘배우자 고르는 법’에 대한 의견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여자는 뭐니뭐니해도 첫째 맘이 착해야 하고, 둘째 용모가 우아하고, 셋째 몸이 통통해야 한다.” 고 했다. 선생님 자신이 빼빼 체질인 때문인지 마른 여자는 절대 사양한다고 하셨다. 허기사 고기도 살집이 통통해야 먹을 맛이 있지 뼈다귀가 씹히는 KBS(=갈비씨)를 어디 쓰겠는가. 요새 필요이상으로 다이어트 하느라고 고생하는 여인들은 새겨들을 일이다. 선생님은 이 중에서 세 번째의 조건을 강조하 셨는데 그 이유가 “그래야 약값이 안 든다”는 것이었다. 또, 불행히도 우리 사는 현실에서는 “There are only two good women in the world; one is in paradise, the other not found.” 라는 영어속담처럼 이 셋을 다 갖춘 여성은 찾기 힘들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는 여자라면 모름지기 얼굴이 최고고, 다음에 돈이지 건강이니 심성이니 하는 것은 그냥 하는 소린 줄 알았다. 이제 사회에 나와 반 너머 살아 보니 그때 그 말씀이 진정이었음을 절감한다.
유 선생님은 누가 뭐라 해도 똥의 대가이시다. 한 시도 똥을 빼놓고 선생님을 얘기할 수는 없다. 매일 똥을 바가지로 퍼와서 바리바리 풀어놓는다. 이렇게 들어먹은 “똥” 이바구는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똥을 싸는 더러움과 치우는 아름다움을 함께 배운 것이다. 선생님의 똥 철학은 기본적으로 “똥들은 아무따나 키워도 복이 많고 좋은 거름이 될 것이다” 라는 똥에 대한 강한 신뢰에서 출발한다. 이 똥의 미학자는 우리 回期를 마지막으로 교사직을 그만 두고 이듬해 부산대학 법정대로 옮겼고, 그 후 동학장을 거쳐 경성대 총장을 지낸 후 지금은 여일을 재택하고 계신다.
우리는 남달리 졸업식 날 시내에서 사은회를 베풀었고, 졸업 후 몇 번인가 반창회(班窓會)를 열어 선생님을 모신 적이 있다. 그때 가장 대표 문제아였던 ‘영고이’ (=김영곤)는 지금도 부산에서 선생님의 집안 머슴 노릇(?)을 자청해서 하고 있고, 종로에서 한의원을 하는 ‘상태’나 청량리에서 개업하고 있는 노재철 박사는 선생님의 주치의가 된 지 오래다. 나머지 문제아들도 ‘상욱이’만 빼고 다 살아 있어 늘 사제의 정을 그리워하고 있다. 선생님은 아직도 반 아이들 이름을 외울 정도라니 그 정이 얼마나 깊으시겠는가. 우리가 고교의 마지막 제자였으니 더욱 애착하시는지 모른다. 듬직한 김장섭 반장을 비롯하여 누구든 툭 하면 별명 하나씩 얻어 걸렸다. 정작 당신은 별명이 ‘유담뽀’였는데 이는 선배 회기에서 붙여준 별명으로 우리 때는 잘 쓰지 않았다. 아무튼 우리 5반 아이들은 지금이라도 “헤쳐 모엿!” 하고 누군가 외치면 여기저기서 제백사 하고 달려올 것으로 자신한다. 그만큼 5반에 대한 수평적 애착이 강하고 그 때 그 시절의 우정이 너무나 도타웠고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최을림 선생님
최 선생님은 바로 옆 6반 담임이셨는데 큰 덩치에 눈빛이 검고 엉큼하여(?) 임꺽정이 아우쯤 되는 형용으로 무섭게 생기셨다. 3학년 첫 국어시간. 대뜸 칠판에 “腰下莫非美人(요하막비미인)”이라는 한문을 커다랗게 써놓고 “이 뜻을 아는 학생 있는가?” 묻는다. 아무도 대답을 않 자, “그래 지금은 모르겠지… 차차 알게 될 거야.” 라고 하며 수업에 들어갔다. “허리 아래 미인 아닌 것이 없다”는 말뜻이야 그때라고 몰랐으랴만 대뜸 공부와는 무관한 이런 성 담론을 꺼내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다. 古文을 가르칠 때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나오는 “부생육기”를 인용하면서 “측간에서 처녀귀신이 총각의 그거를 꽉 잡았단 말이야…” 하고 주먹을 불끈 쥐면 우리의 간 작은 전송원(현 마산 산부인과원장)이 같은 아이는 겁이 나서 벌벌 떨었다. 선생님은 별명도 “GMTT(=거무티티)”였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언제나 선생님을 생각하면 음담패설부터 먼저 떠오른다. 그의 아들 최연무가 1반에 있어 우리에겐 아버지 같기도 하여 선생님을 만만히 보고 은근히 놀려 먹기도 해서 일화가 많았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는 “그런 게 있어! 몰라도 돼!” 하고 곧잘 피해버리던 최 선생은 나중에는 우리 반과 정이 들어 자기 반 아이들보다 더 좋아하셨다. 최 선생의 5반에 대한 인상 소감을 들어보자.

●삽화 - 박세형(24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만화학과 교수
“평을 한다면 마, 1반에는 잠자는 놈이 너무 많고… 5반은 안달이 좁쌀 친구들이 너무 만타 말이야. 명랑하지마는 떠들썩하다. 말하자면, 수재 가운데 농땡이가 많이 끼어있는 거지. (아이들이 “와아” 웃자) 왜 웃어? 그런데, 경제적으로 곤란을 당하고 있는 벗들의 납부금을 대신 보아준 사람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야. 지. 덕 양면에 긍(亘)하여 모범 반이라 하겠다. 인간성이 향기롭게 풍기는 것 같고…” 한마디로 5반이 어떠했다는 것은 이 말로 충분할 것 같다. 미추와 선악과 시비를 고루 갖추고 있었다 할까. 겉으로 무서운 척하였으나 속으로 선생님의 깊은 이해심이 우리를 감쌌다고 본다.
이렇게 겉 다르고 속 달랐던 최 선생님은 때로 이상적인 여성상을 두고 “보통으로 생겨야 하는 것은 최저 라인,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 남편의 뒷다리를 드는 여인은 질색”이라고 전제하고 “속인다는 벽을 없애고 적나라하게 생사를 도(賭)하는 여인, 가난을 문제시 않고 고락을 함께 할 여인”을 최고로 꼽았다. 한마디로, 돈 못 벌어 주더라도 군말 않는 여인을 최고로 치시는 것 같은 말씀인데 글쎄요,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바구일까요? 요새처럼 “돈 잘 벌어주고 일찍 죽는 남편”이 최고라는 세상에서 그런 소리하다가는 암, 뼈도 못 추리시지요. 그러나, 이 간 큰(?) 선생님의 말씀은 다소 감상적이긴 하지만 당시 가정적으로 처가 쪽 보증 잘못 섰다가 자기도 모르게 집이 넘어가고 막대한 채무자가 된 그 쓰라린 경험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마지막 수업에서, “각반 40명 전교 300명은 대학에 합격하고 서울대에는 많이도 말고 각반 15명만 걸리도록 하라. 사회에 나가서는 뒤지지는 않지만 너무 악착하지는 말고 올바른 가운데 인간미가 있어야 하며, 은사보다 잘 돼도 은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라고 하여 은사의 몫을 강조하셨다. 자주 찾아오라는 말씀인데 그때는 다같이 큰소리로 “예” 하고 대답하였으나, 글쎄, 아직도 “예”라고 답할 수 있는 제자들이 얼마나 될까.
故 박구하(18회)
똥에 웃고 똥에 운 나날들
오늘은 61년 12월 24일. 마지막 방학이 시작되는 날이다. 학급일지도 이제 막장에 다다랐다. 거기에는 대자보로 “와탕카! 남은 37일, 앞으로 나가자! 갔다오면 내 딸 주마아~”라고 적혀 있다. 이제 길고도 짧은 고교 3년은 완전히 역사의 저편으로 묻힌다. 아직 졸업식과 대학입시가 남아 있지만 사실상 공부는 끝났다. 교복을 벗으며 그간 동고동락한 선생님들의 일화와 상투어록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겠다.
당시 수업편성은 1~4반, 5~8반의 2개조로 나뉘어 교사진도 달랐다. 예컨대, 국어에서 1조는 서문경, 2조는 최을림이었고, 영어는 1조 노기석, 2조 유수현. 수학은 강석우, 정진헌… 이런 식이었다.
똥의 미학가 유수현 선생님
“영고이, 정고이, 규화이, 상태, 상우기, 상주이, 승화!! 얼굴이 벌거무리~ 하이 해 가지고 대체로 똥이다. 이넘들아 무신 말인지 논쪼 알겐나, 엉이?” 이것은 유 선생님의 단골 메뉴로 하도 들어서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읊어도 막힘 없이 술술 나온다. 이 ‘영고이’에서 ‘승화’까지는 도레미파솔라시도로 단숨에 나오는데 곡조와 리듬이 선생님 특유의 음색으로 ‘잘도 잘’ 짜여 있다. 여기 거명된 놈들은 (담임의 눈으로 볼 때) 대체로 문제(?)가 있는 놈들이어서 담임은 학급에서 무슨 문제만 생겼다 하면 맨 먼저 이 놈들의 동태부터 살피는 것이었다. 그러면 희한하게도 이들 중에서 답이 나오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고백을 직접 들어보자.
“모도다 똥 같은 놈들이지만 실상 미운 놈은 하나도 없다. 눈앞이 캄캄하도록 호통 벼락을 맞고도 수 분 후에는 언제 그랬더냐 하고 넙띠기 같은 얼굴이 싱글벙글하니 이놈들이 씰개가 있는 놈들인지 없어서 그런 건지 내 진심을 이해해서 그런 건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진짜로 유 선생을 좋아했다. 그 유들유들한 유모어가 좋았고, 정치학과 출신답게 때때로 시대 현실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지성이 좋았고, 영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학습요령에 대해 알기 쉽게 그러나 수준 있게 가르쳐 주고 일본이나 외국에서 시행하는 고급의 시험문제를 직접 타이핑해 와서(그때는 타자기가 귀했다) 나누어주면서 입시에 대비하도록 유의해 주셨다. 당시 암살 당함으로써 더욱 위대해진 케네디 대통령보다 우리는 유 선생님을 더 존경하였다.
언젠가 ‘배우자 고르는 법’에 대한 의견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여자는 뭐니뭐니해도 첫째 맘이 착해야 하고, 둘째 용모가 우아하고, 셋째 몸이 통통해야 한다.” 고 했다. 선생님 자신이 빼빼 체질인 때문인지 마른 여자는 절대 사양한다고 하셨다. 허기사 고기도 살집이 통통해야 먹을 맛이 있지 뼈다귀가 씹히는 KBS(=갈비씨)를 어디 쓰겠는가. 요새 필요이상으로 다이어트 하느라고 고생하는 여인들은 새겨들을 일이다. 선생님은 이 중에서 세 번째의 조건을 강조하 셨는데 그 이유가 “그래야 약값이 안 든다”는 것이었다. 또, 불행히도 우리 사는 현실에서는 “There are only two good women in the world; one is in paradise, the other not found.” 라는 영어속담처럼 이 셋을 다 갖춘 여성은 찾기 힘들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는 여자라면 모름지기 얼굴이 최고고, 다음에 돈이지 건강이니 심성이니 하는 것은 그냥 하는 소린 줄 알았다. 이제 사회에 나와 반 너머 살아 보니 그때 그 말씀이 진정이었음을 절감한다.
유 선생님은 누가 뭐라 해도 똥의 대가이시다. 한 시도 똥을 빼놓고 선생님을 얘기할 수는 없다. 매일 똥을 바가지로 퍼와서 바리바리 풀어놓는다. 이렇게 들어먹은 “똥” 이바구는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똥을 싸는 더러움과 치우는 아름다움을 함께 배운 것이다. 선생님의 똥 철학은 기본적으로 “똥들은 아무따나 키워도 복이 많고 좋은 거름이 될 것이다” 라는 똥에 대한 강한 신뢰에서 출발한다. 이 똥의 미학자는 우리 回期를 마지막으로 교사직을 그만 두고 이듬해 부산대학 법정대로 옮겼고, 그 후 동학장을 거쳐 경성대 총장을 지낸 후 지금은 여일을 재택하고 계신다.
우리는 남달리 졸업식 날 시내에서 사은회를 베풀었고, 졸업 후 몇 번인가 반창회(班窓會)를 열어 선생님을 모신 적이 있다. 그때 가장 대표 문제아였던 ‘영고이’ (=김영곤)는 지금도 부산에서 선생님의 집안 머슴 노릇(?)을 자청해서 하고 있고, 종로에서 한의원을 하는 ‘상태’나 청량리에서 개업하고 있는 노재철 박사는 선생님의 주치의가 된 지 오래다. 나머지 문제아들도 ‘상욱이’만 빼고 다 살아 있어 늘 사제의 정을 그리워하고 있다. 선생님은 아직도 반 아이들 이름을 외울 정도라니 그 정이 얼마나 깊으시겠는가. 우리가 고교의 마지막 제자였으니 더욱 애착하시는지 모른다. 듬직한 김장섭 반장을 비롯하여 누구든 툭 하면 별명 하나씩 얻어 걸렸다. 정작 당신은 별명이 ‘유담뽀’였는데 이는 선배 회기에서 붙여준 별명으로 우리 때는 잘 쓰지 않았다. 아무튼 우리 5반 아이들은 지금이라도 “헤쳐 모엿!” 하고 누군가 외치면 여기저기서 제백사 하고 달려올 것으로 자신한다. 그만큼 5반에 대한 수평적 애착이 강하고 그 때 그 시절의 우정이 너무나 도타웠고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최을림 선생님
최 선생님은 바로 옆 6반 담임이셨는데 큰 덩치에 눈빛이 검고 엉큼하여(?) 임꺽정이 아우쯤 되는 형용으로 무섭게 생기셨다. 3학년 첫 국어시간. 대뜸 칠판에 “腰下莫非美人(요하막비미인)”이라는 한문을 커다랗게 써놓고 “이 뜻을 아는 학생 있는가?” 묻는다. 아무도 대답을 않 자, “그래 지금은 모르겠지… 차차 알게 될 거야.” 라고 하며 수업에 들어갔다. “허리 아래 미인 아닌 것이 없다”는 말뜻이야 그때라고 몰랐으랴만 대뜸 공부와는 무관한 이런 성 담론을 꺼내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다. 古文을 가르칠 때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나오는 “부생육기”를 인용하면서 “측간에서 처녀귀신이 총각의 그거를 꽉 잡았단 말이야…” 하고 주먹을 불끈 쥐면 우리의 간 작은 전송원(현 마산 산부인과원장)이 같은 아이는 겁이 나서 벌벌 떨었다. 선생님은 별명도 “GMTT(=거무티티)”였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언제나 선생님을 생각하면 음담패설부터 먼저 떠오른다. 그의 아들 최연무가 1반에 있어 우리에겐 아버지 같기도 하여 선생님을 만만히 보고 은근히 놀려 먹기도 해서 일화가 많았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는 “그런 게 있어! 몰라도 돼!” 하고 곧잘 피해버리던 최 선생은 나중에는 우리 반과 정이 들어 자기 반 아이들보다 더 좋아하셨다. 최 선생의 5반에 대한 인상 소감을 들어보자.
●삽화 - 박세형(24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만화학과 교수
“평을 한다면 마, 1반에는 잠자는 놈이 너무 많고… 5반은 안달이 좁쌀 친구들이 너무 만타 말이야. 명랑하지마는 떠들썩하다. 말하자면, 수재 가운데 농땡이가 많이 끼어있는 거지. (아이들이 “와아” 웃자) 왜 웃어? 그런데, 경제적으로 곤란을 당하고 있는 벗들의 납부금을 대신 보아준 사람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야. 지. 덕 양면에 긍(亘)하여 모범 반이라 하겠다. 인간성이 향기롭게 풍기는 것 같고…” 한마디로 5반이 어떠했다는 것은 이 말로 충분할 것 같다. 미추와 선악과 시비를 고루 갖추고 있었다 할까. 겉으로 무서운 척하였으나 속으로 선생님의 깊은 이해심이 우리를 감쌌다고 본다.
이렇게 겉 다르고 속 달랐던 최 선생님은 때로 이상적인 여성상을 두고 “보통으로 생겨야 하는 것은 최저 라인,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 남편의 뒷다리를 드는 여인은 질색”이라고 전제하고 “속인다는 벽을 없애고 적나라하게 생사를 도(賭)하는 여인, 가난을 문제시 않고 고락을 함께 할 여인”을 최고로 꼽았다. 한마디로, 돈 못 벌어 주더라도 군말 않는 여인을 최고로 치시는 것 같은 말씀인데 글쎄요,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바구일까요? 요새처럼 “돈 잘 벌어주고 일찍 죽는 남편”이 최고라는 세상에서 그런 소리하다가는 암, 뼈도 못 추리시지요. 그러나, 이 간 큰(?) 선생님의 말씀은 다소 감상적이긴 하지만 당시 가정적으로 처가 쪽 보증 잘못 섰다가 자기도 모르게 집이 넘어가고 막대한 채무자가 된 그 쓰라린 경험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마지막 수업에서, “각반 40명 전교 300명은 대학에 합격하고 서울대에는 많이도 말고 각반 15명만 걸리도록 하라. 사회에 나가서는 뒤지지는 않지만 너무 악착하지는 말고 올바른 가운데 인간미가 있어야 하며, 은사보다 잘 돼도 은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라고 하여 은사의 몫을 강조하셨다. 자주 찾아오라는 말씀인데 그때는 다같이 큰소리로 “예” 하고 대답하였으나, 글쎄, 아직도 “예”라고 답할 수 있는 제자들이 얼마나 될까.
故 박구하(18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