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조만담[제21화] 멀고도 가까운 사제지간

202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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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4월 호부터 연재되어 동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故 박구하 동문(18회)의 '그때 그시절, 그리운 이야기들 - 청조만담'을 리바이벌 연재합니다. 

박 동문은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한일은행, 부산은행 지점장과 (주)기아인터트레이드 대표이사를 역임하였습니다. 계간 『시조문학』 추천으로 등단하여 시조시인으로 활동하였고, 계간 『시조문학』 편집인을 지내던 중 2008년 작고하였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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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일 선생님은 독일어 선생이셨는데 키가 훌쩍 크고 얼굴이 무표정한 게 정말 독일인처럼 생기셨다. 얼굴 반쪽이 육이오 전쟁 때 유탄을 맞아 퍼런 멍자국이 크게 나 있는 청면(靑面)이어서 보기에 흉했으나, 늘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독일문학과 시를 이야기하셨다. 때로 수업 중에 직접 지은 시를 읽어주셨는데 대체로 난해하였다. 어떤 시에서는 당시 과부가 된 재클린 케네디의 절규 “오, 노(no)!”를 연발하거나, “오, 실바나 망가노여!” 하고 당시 육체파 여배우를 외쳐 부르는 구절도 있었다. 박 선생님은 당시 등단은 하지 않았지만 외견상 가장 시인다웠다. 늘 소년처럼 꿈꾸는 듯한 표정에다 목가적이고 여성적이었다. 이에 비하면 당시 현역 시인이던 살매 선생이나 안장현 선생은 그 언행이 직설적이고 단호하여 시인답지(?) 못했다.

박 선생님은 틈틈이 특유의 논리를 체계화시킨 ‘의미학(意味學)’에 대하여 이야기도 하고 교지인 <청조>에 이에 관한 논문도 발표하셨지만 우리 고교생 수준에서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초미의 관심사인 입시 준비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영양가 없는 이야기인 탓도 있었다.

 

꿈꾸는 만년소년 박래일 선생님

박 선생님은 당시 또 다른 독일어 교사 돌배 선생님과는 여러 면에서 대비가 되었다. 성격과 교육방식이 판이하게 달랐다. 돌배 선생이 적극적인 성향이라면 박 선생은 소극적인 성향으로 비췄다. 공부도 돌배 선생처럼 무조건적으로 외우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학습을 유도하셨다. 발음도 “데아 데스 뎀 덴, 디 데아 덴 디…” 하면서 마치 혜은이가 노래하듯 솜사탕이 굴러가는 듯 사뿐사뿐 시적으로 부드럽게 발음하셨다.

1학년 때 배운 하이네의 ‘로렐라이’ 시구를 읽을 때는 꼭 꿈꾸는 소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Ich weiss nicht, was sollen es bedeuten,

왜 그런지 그 까닭은 알 수 없지만

Das ich so traurig bin;

내 마음은 자꾸만 슬퍼지고

Ein Marchen aus alten Zeiten,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 하나

Das kommt mir nicht aus dem Sinn.

내 마음에 자꾸만 메아리친다

 

이 시에는 꿈 많은 소년 시절에 꿈을 느끼게 해주었던 아련한 향수 같은 게 있다. 나는 이 슬픈 전설이 주는 기억을 찾아 졸업 후 언젠가 ‘라인강의 진주’라는 로렐라이 언덕에 가보았다. 그러나, 독일의 마인츠에서 뤼데스하임까지 가는 라인강변의 경관이야 좋았지만 실제로 로렐라이언덕은 별 게 없었다. 오히려 오랜 꿈만 흐려버린 것 같아 안 가느니 못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눈 감고 고교 시절 박 선생님 흉내를 내면서 모처럼 객수에 젖었던 적이 있다.

박 선생님은 일상생활에서도 믿음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고, 우리더러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고, 스스로도 그 길을 가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안다. 늘 고개를 바짝 들고 하늘을 우러르며 걷는 폼이 덜 성장한 아이 내지는 꿈꾸는 소년 같았다 라고 하면 무례가 될까. 그렇다고 우리에게 곰살궂지도 않았고 언제나 과묵하셨으므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었다. 그리고는 우리더러 ‘의미학적 생활’을 하라고 당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의미학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학적 생활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무슨 심오한 학문인가 보다 하고 막연히 이 선생이 보통 교사와는 어딘지 틀리는 철학적인 분이거니 여겼을 뿐이다.

박 선생님도 5반에 대해서는 “정의감 있고 이해력은 좋으나, 세련되지 않았다.”라고 촌평해 주셨다. 하기야 세련되었더라면 어찌 우리가 촌놈이란 소리를 들었을 것인가. 1985년 해운대 글로리 콘도에서 거행된 졸업 20주년 홈커밍 행사 때, 선생님은 1학년 때 내 담임이기도 해서 나를 특히 기억하시고는 옆자리에 앉아 내 손을 시종 잡고 놓아주지 않았는데 손아귀에 꼭꼭 눌러오던 악력이 무척 외로운 느낌으로 받아져 마음이 아팠다. 가정적으로 무슨 문제가 없으신지, 무슨 대학에 나가신다고 한 것 같았는데 그때의 의미학은 성취를 보셨는지 궁금했으나 여쭈어보지 못했다. 돈은 없고 학문의 길은 멀고 해는 짧고 뭐, 대충 이런 비빔밥 심정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내내 건강하시기 바란다.

 

올라운드 플레이어 돌배 송영각 선생님

부고명물 돌배! 돌배 선생님을 모르면 부고 출신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선생님이셨는데 나는 아직도 그분의 주전공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마치 유행가 ‘호랑나비’와 ‘왕십리’ 딱 두 곡을 부른 김흥국이가 가수인지, MC인지, 축구응원단장인지, 선거 운동원인지 잘 가늠이 안 가는 식이다. 돌배 선생님은 경성제대 예과 출신으로 서양사를 전공하였다고 하는데 독일어, 영어, 세계사 등을 두루 가르쳤다. 작달막한 키에 눈이 작고 행동은 다람쥐처럼 민첩하였다. 앞서 얘기한 박래일 선생님이 귀공자 스타일이라면 돌배 선생은 그 별명만큼이나 잡초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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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 박세형(24회)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 


공부도 돌배 선생은 학생들을 초등학생 다루듯이 무조건적으로 외우라고 강요하고 교탁에 회초리를 탁탁 때리면서 겁을 주었다. 발음도 무지막지한 일본식이었고 강의도 일방통행이었다.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손가락을 쫙 벌려 분필을 네 손가락에 꽉 끼우고 손등으로 도배하듯 한 번에 흑판을 좌측 끝에서 우측 끝으로 긋는다. 그러면 울퉁불퉁한 4선보가 선명히 그려진다. 그 위에 대고 독일어 정관사 4격을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적어놓고는 무지막지한 일본식 발음으로 “데루 데수 땜 땐… 띠이 데루 땐 띠이.” 하고 일사천리로 읽어 나간다. 작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열을 내는 모습은 가히 희화적이다.

돌배 선생은 잡초답게 땜빵도 잘해 2학년 때 나는 돌배 선생에게서 영어 독해를 배웠는데, 사실 그 강의 수준은 공부에 미친(?) 학생들에게는 입시용으로 함량미달이었다. 이 점에서는 박래일 선생님도 입시보다는 교양을 중시하는 쪽이어서 두 분 다 공부벌레 학생들에게는 별반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반란 모의를 했다. 강의 내용에 불만을 품고 고교 초유의 학급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다. 가을 어느 날, 돌배 선생 시간에 우리는 칠판에 “선생님의 수업을 거부합니다!”라고 커다랗게 써 놓고(글씨: 박호룡) 선생님이 들어오자 모두 책상에 머리를 처박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선생님은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그 후 교무주임, 담임, 학생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어 사태를 수습하고 수업 분위기를 바꾸어 서로 화해(?)하였지만 이 일은 지금 생각해도 두고두고 민망한 일이다.

돌배 선생은 바둑이나 낚시를 좋아하여 당시 유단자급 실력을 가지고 있던 박근보(부산화학 사장) 군을 불러 심심하면 숙직실에서 바둑을 두셨다. 삼매경에 빠지면 밤늦게까지 바둑을 두었다. 이 때문에 벌어진 일화 한 토막.

한번은 추상호 선생님의 생물 시간에 선생님이 콩과 박테리아와의 共生(공생)관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전날 돌배 선생에게 붙들려 바둑 두느라 잠을 못 잔 박근보 군이 가물가물 졸자 호랑이 선생님은 당장 그를 일으켜 세워 방금 설명한 “콩과 박테리아의 관계가 무슨 관계냐?”라고 물었다. 엉겁결에 일어난 박 군은 “예, 밀, 밀접한 관계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추 선생님은 후일 중앙여고교장을 지내셨는데 덩치가 크고 워낙 무서워 아이들은 웃지도 못하고 킥킥대었다. 선생님이 기가 차서, “그래애?…어떻게 밀, 밀접한 관계냐?”고 추궁하자 아이들은 더 참지 못하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엉뚱한 답도 답이려니와 당시 ‘밀접한 관계’란 은어로 여학생과의 육체관계를 의미했기 때문에 영문을 모르는 선생님 표정이 더 우스웠던 것이다.

지금도 돌배 선생님은 서울 회현동에 있는 8회 동창회 사무실에 가끔 나오셔서 바둑도 두시고 낚시도 다니신다고 한다. 특히 찌를 잘 만들어 누가 부탁하면 일만 정성으로 이를 만들어 보내주신다고 한다. 옛 제자들에게 폐 끼치는 일은 조금도 아니 하신다고 하니 관심 있는 분은 한번 연락해 보기 바란다.


『청조인』 2002년 12월(1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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