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조만담[제20화] 소풍 끝내고 가신 선생님들

2025-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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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4월 호부터 연재되어 동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故 박구하 동문(18회)의 '그때 그시절, 그리운 이야기들 - 청조만담'을 리바이벌 연재합니다. 

박 동문은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한일은행, 부산은행 지점장과 (주)기아인터트레이드 대표이사를 역임하였습니다. 계간 『시조문학』 추천으로 등단하여 시조시인으로 활동하였고, 계간 『시조문학』 편집인을 지내던 중 2008년 작고하였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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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취화선’, ‘오아시스’가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을 때 우리는 가슴이 찡했다. 지금 우리 영화는 세계시장에서 급성장하고 있다. 이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제작사와 감독의 기량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 땅에 영화가 바로 설 수 있게끔 입지를 제공한 인적, 물적 인프라 구축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부산은 어떤가? 한국영화에서 부산은 영화산업의 불모지였다. 전통적으로 부산은 영화의 생산지가 아니라 소비지로 기능해 왔다. 제대로 된 영화평론 없는 부산은 영화산업에서 불구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부산이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최대이자 아시아영화제의 메카로 부상하였다. 부산은 우리 곽경택(38회) 감독의 ‘친구’ 제작 이후 수많은 영화인들로부터 꿈의 촬영장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이제 영화산업은 기업체가 빠져나간 후 침체된 부산경제에 새로운 활력소로 인식되고 있을 정도다. 부산은 영화의 생산과 소비가 겸전된 완전 시장으로 변모한 것이다. 오늘의 이 눈부신 발전은 그냥 이룩된 것일까? 천만에! 거기에는 일찍이 영화평론을 제창하고 인프라를 육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 세력이 있었다. 그 세력의 핵심에 바로 장갑상 선생이 계셨다.

 

갓 쓴 영국신사 장갑상 선생님

노석(路石) 장갑상(張甲相. 1922~1988) 선생은 1950년대 불모지 부산영화계에 ‘영평(영화평론)’ 운동을 일으킨 핵심인사요, 어려운 여건에서 1980년대 이 운동을 재건시켜 “부산은 결코 변방이나 주변부가 아니다. 할리우드에 대한 뉴욕영화의 예처럼 부산영화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역설하며 우수영화 베스트10 선정발표, 영평상의 제정, 영진공 부산지사 설치, 종합촬영소의 부산 이전을 주장, 건의하고 극장주들에게 시설개선을 촉구하는 등 부산영화 발전에 밑거름을 놓은 ‘부산영화 지킴이’로 재평가되고 있다.

또 『영화와 비평』이라는 평론집도 내었는데 이것은 1951년~1969년 부산지역의 일간지에 써온 269편의 영화평과 34편의 시론들을 모은 것이다. 선생은 영화평뿐 아니라 문학 비평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특히 『에드거 알란 포우의 문학』, 현대시의 형태론자 『허버트 리드의 문학관』에 관한 저서도 있다. 이러한 이론과 실천은 언제나 선생의 엄격주의와 침착함이 바탕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훌륭한 분을 은사로 하여 배웠던 복된 제자들이다.

선생은 부산고의 위대한 페스탈로치 김하득 교장이 스카웃해 온 분으로서 영어 原講(원강)을 강의하셨다. 우리는 입시에 도움이 되는 공부라기보다 일종의 교양으로서 영문학을 배운 느낌이다. 주로 E.A.포우와 헤밍웨이의 단편을 배웠는데, 이는 다양한 문체를 통하여 독해력을 늘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선생은 문법 같은 지엽적인 문제보다 문장 전체를 직역을 통해 의역하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우리 촌놈들에게 세계문학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내용 중 “인간은 패배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는 노인의 독백은 입시를 앞둔 우리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이것은 삶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말이었다. 뿐만 아니라 틈틈이 헤밍웨이의 소설 중 영화화된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의 영화평을 해설해 주셨다.

헤밍웨이가 성격이 괴팍하여 메가폰을 잡는 감독마다 영화화하는 조건으로 자기 친구인 미국의 전설적인 배우 게리 쿠퍼를 주연으로 발탁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래서 나이 많은 게리 쿠퍼와 젊은 잉그리드 버그만의 언밸런스한 배역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기도 하셨다.

나는 “장갑상 선생님!”이라 하면 늘 액자에 걸어놓은 사진처럼 꼿꼿한 자세가 이미지로 떠오른다.

언제나 머리에 ‘찍구’를 바르고 가르마를 단정히 빗어 넘겨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깔끔한 용모에 검은 싱글 양복을 입고 다녀 영국신사로 통했다. 영국신사는 영국신사인데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셨으니 갓 쓴 신사라 할까.

 

우리 것을 사랑한 참스승 홍영식 선생님

선생은 교양서적으로 우리에게 홍자성이 쓴 『채근담』과 바르게 사는 표본으로서 빅톨 유고의 『레미제라블』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우리 민족정기를 잃어서는 안되며 지금 학생들의 어깨에 이 나라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하면서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 되어줄 것을 당부하셨다.

일생에서 가장 슬펐던 일은 육이오 때 가르친 제자가 전쟁에 나가 많이 전사한 일이라고 하였다. 가정적으로도 가난했던 자신보다 제자와 사회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앞섰던 우리 시대의 앞선 지성인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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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 박세형(24회)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 


수업 시간에 우리 5반 아이들은 입시 위주 선생이 아니면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열심히 듣는 놈은 듣고 조는 놈은 졸고 딴전 피우는 몸은 딴전을 피웠다. 수업에 아예 들어오지 않는 놈도 이 시간에 가장 많았다.

다른 선생들 같으면 벼락 불똥을 내릴 상황인데도 선생님은 한 번도 호통치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완전 방관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고르지 못한 학습태도’를 지적하면서도 늘 학생들의 자율적 태도를 존중하신 분이다. 선생의 상투어 중 한 부분을 인용해 보면, “저기 하품! 제3의 사나이! 잠자러 왔는가? … 방금 잡담하고 있는 사나이, 그 옆의 동지, 이게 자율적 학습태돈가?” 하고 조용조용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로 영화제목을 인용하여 지적할 때는 메뚜기도 낯짝이 있지 이내 숙연해지곤 했다.

학교 시절에 대입 위주로 지식만 열심히 가르쳐 주신 선생님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도 교양이나 교과서 외적인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들은 세월이 갈수록 되살아난다. 왜 그럴까. 선생님은 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가혹했던 전형적인 분이다. 그런 분이 간암이라는 병마에 붙들려 일찍 가시다니 참으로 분하다.

홍영식 선생은 1학년 때 국어 담당이셨는데 그때는 이미 정년 퇴임하였음에도 학교 측의 부탁으로 향리 경남 기장에서 출강을 나오셨다. 우리 교실이 그때 신관 1층에 있었는데 선생님은 2, 3층은 계단 올라가기가 힘들어 1학년 담당을 자청했다고 하면서 강의는 늘 앉아서 하셨다. 처음에는 늙은 영감이 무얼 알겠는가. 고리타분하고 실력 없는(?) 선생을 만나 잠만 오겠구나 하고 실망하였으나 수업이 진행될수록 그게 아니었다. 구수한 입담에다 아는 것이 조선 팔도 안 미치는 곳이 없고 선생님의 함자가 대한제국의 개화파인 박영효와 쌍벽을 이룬 홍영식과 동명이라 당시 시대상과 개화파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다. 덕분에 우리는 때 이르게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고, 세기말 국가 민족의 장래에 대해 막연하나마 우리 청년의 사명을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한번은 수업 중에 우리 민요를 알아야 한다며 민요를 직접 부를 테니 따라하라고 하셨다. 국어 선생이 노래를 가르친다는 것은 지금도 생소한 일일 게다. 풍금도 없이 육성으로 ‘풍년가’ 를 부르고 서양음악 이전에 우리 음악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금수강산에 풍년이 왔네/ 지화 좋네 얼씨구나 좀도 좋으냐/ 명년 춘삼월에 화전 놀이 가자.」 이 가사는 그때 한 시간 내내 따라 불렀기에 아직도 내 몸에 배어 있다. 끝 부분 ‘명년 춘삼 월에 화전 놀이 가자’에서 「요즘(=그 당시의) 민요 가수들이 ‘화전 놀이를 가자’ 하며 전에 없던 ‘를’ 자를 넣고, 음의 변화를 노려 멋지게 부를 양으로 ‘놀이를’에서 청을 높여(=한 옥타브 올려) 부르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니 원형대로 불러야 한다」고 주의를 주시던 것까지 기억이 생생히 난다.

선생님은 상식이 풍부하여 당시 동아일보의 말맞추기 퀴즈에도 여러 번 당첨되셨다. 그때는 정답자가 많지 않아 전국에서 선생님 혼자만 맞춘 적도 있었다. 지금 저세상에서도 퀴즈 응모로 용돈을 벌고 계시는지 궁금하다.


『청조인』 2002년 11월(1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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