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 호부터 연재되어 동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故 박구하 동문(18회)의 '그때 그시절, 그리운 이야기들 - 청조만담'을 리바이벌 연재합니다.
박 동문은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한일은행, 부산은행 지점장과 (주)기아인터트레이드 대표이사를 역임하였습니다. 계간 『시조문학』 추천으로 등단하여 시조시인으로 활동하였고, 계간 『시조문학』 편집인을 지내던 중 2008년 작고하였습니다. (편집자주)
아름다운 욕쟁이 시인, 살매 김태홍 선생님
홀아비 부산고의 영원한 파트너, 과부 경남여고 교정에는 우리나라 여성상의 사표로서 신사임당의 좌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 碑面(비면)에는 뜻밖에 살매 김태홍 선생의 다음 시가 새겨져 있다.
“착한 딸들이여,
보람은 여름하여
미쁜 아내 일이라
갸륵한 어머니 일이라
하여
물처럼 슬기로운 평범
길을 여는 빛으로 황홀하리라”
어떤 연유로 이 시가 거기에 새겨져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은사의 시가 모교 인근의 여학교의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살매는 김태홍 선생의 아호다. 선생님은 우리 재학 당시 안장현 선생님과 같이 문단의 현역 시인이셨다. 두 분은 동인 활동도 같이 할 정도로 가까웠다. 살매 선생은 얼굴은 호박처럼 쭈글쭈글하셨지만 마음은 비단같이 매끌매끌하셨다. 겉으로 정나미 떨어지는 ‘소리’(말이 아님!)를 예사로 해대는 셈치고는 매우 자상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분이셨다.
늘 공부에만 매달려 점수 따기에 혈안이 된 우리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하셨다. 그 왕방울 같은 눈을 굴리며 우리더러 “이 졸렬한 놈들아, 먼저 사람이 되는 것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보다 급하다”고 하시면서 재빠른 토끼보다 여유 있는 거북이 되기를 바라셨다. 또, 남자는 졸렬하거나 융통성 없이 살아서는 안 된다 하시면서 세상은 가정이 기본이므로 우리더러 이다음에 결혼해서도 “딸하고 댄스를 출 수 있을 만큼 동심을 지닌 아버지가 되라”고 하셨다. 그러면 마누라가 바가지를 긁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어느 싱거운 놈이 질문을 하자 대뜸 “남자는 여자가 절대로 바가지를 긁게 해서는 안 된다… 안 되면 폭력으로라도!” 하고 대답하셨다. 바가지를 긁지 않게끔 평소 돈을 잘 벌어 주던가 사랑을 잘 해주라는 뜻이겠지만 우리는 시인의 입에서 거침없이 나오는 ‘폭력불사’라는 말이 의외였다. 그래도, 그때는 왠지 폭력적으로 들리지 않고 멋있게 들렸다.
나와 너 외엔 모두가 우수마발(牛溲馬勃)
선생님은 우리 3학년 5반을 한마디로 ‘우수마발’이라고 평하셨다. 이 말은 그때 국어 교과서에 실린 양주동 박사의 ‘면학의 서’라는 글에서 “내가 일인칭(一人稱), 너는 이인칭(二人稱), 나와 너 외엔 우수마발(牛溲馬勃)이 다 삼인칭야(三人稱也)라.” 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그때는 새로 배운 이 말이 꽤 멋이 있어 학생들 사이에 서로 “야, 이 우수마발아!” 하고 부를 정도로 유행하였는데 이를 선생님이 역이용하신 것이다. 양주동 박사는 다 아다시피 박학다식한 재사로 우리는 그의 글에서 ‘박이부정(博而不精)’이니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함’이라는 현학적이고 고투적인 어법이 생경하면서도 참신한 표현같이 느껴졌다. 선생님은 그 양주동이 옛 부산일보사 앞을 지나가다가 차에 치일 뻔했을 때, “(자신을 가리켜) 국보 죽을 뻔했다!”라고 했다는 일화를 들려주기도 하셨다. 거들먹거리는 거야 취할 바가 없다 하겠지만 면학에 의한 자신감을 가지는 것은 배울 만한 것이다. ‘우수마발’이란 사전적으로 소오줌과 말똥이라는 뜻으로서 가치 없는 모든 것을 이름인데 오줌과 똥은 거름으로도 쓰는 것이니 평범한 가운데 비범을 보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살매 선생은 속정과는 다르게 겉으로는 굉장한 독설가였다. 거의 입만 열면 욕이었다. 훈시든, 강의든 욕에서 시작하여 욕으로 끝이 난다. 그의 3대 단골 욕설메뉴는 ‘식티이 거튼 놈들, 빙씨이 거튼 놈들, 잠충이 거튼 놈들’이었다. 또 ‘졸렬하다’는 단어를 된소리로 발음하며 입에 달고 다니셨는데 우리는 이를 빗대어 유명한 데카르트의 명제 ‘Cogito ergo Sum’을 흉내내어 “우리는 졸렬하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웃고는 하였다. 수업 중 국어 문제를 풀 때도 답안을 두고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이거는 입시 문제치고는 어데? 찌극히 쫄렬하다. 고만 해!” 하고 책을 탁 접고 급하면 인사도 안 받고 나가버린다. 이것이 멋인가, 오줌인가, 똥인가. 그 뒷모습이 ‘찌극히’ 불량하다고 생각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저세상에 가셨단다. 저승도 차 놓칠세라 그리 빨리 가셨나. 빙충이 같은 선생님!
날을 飛(비)자를 잘 쓰면 바람기가 있어
살매 선생은 1925년 경남 창원에서 출생하여 해인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경남여고(1954년 1년간 근무), 부산고 등 고교 교사를 거쳐 국제신보, 부산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하였고, 1985년 부산 충렬고교 교장 재직 중 과로로 별세하셨다. 시집으로 『땅과 장미와 시』, 『창』, 『조류의 합창』, 『당신이 빛을』 등이 있는데, 자유시를 쓰면서도 시보다는 우리 민족의 고유 정형시인 시조에 대하여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계셨다. 1970년대 부산시 교육연구원장으로 재직 시 관내 중·고등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일정 기간에 걸쳐 주기적으로 시조 수 편씩을 써내게 하는 등 시조 교육과 보급 운동에 크게 기여하신 분이다. 이렇게 살매 선생은 부산 시조 발전에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서 박달수(부산시조시인협회장), 임종찬(부산대 교수), 전연희(부일여중 교감) 등 지금 부산의 많은 시조 시인들이 살매 선생의 시조 부흥운동을 통하여 배출되었 다고 한다. 어떤 뜻에서 그리 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러한 노력이 지금 크게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을 볼 때 나도 시조를 쓰는 한 사람으로서 기쁘기 그지없다.

●삽화 - 박세형(24회)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
선생님에 대한 글을 쓰면서 지금 황급히 기억나는 것이 있다. 그날, 3학년 2학기 마지막 수업을 끝내시고는 “다들 잘 살아라.” 하고 유언처럼 한마디 하고는 도사처럼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선생님은 우리를 향해 “졸업 기념으로 사인(sign)을 해 줄 테니 뭐든지 갖고 나오라.”고 하셨다. 아이들은 시인 선생님이 사인을 해 준다고 하니 다투어 기념될 만한 것을 들고 나가 친필 사인을 받았다. 나도 마침 유수현 담임 선생님과 교정에서 찍었던 사진 두 장을 들고 나갔는데 살매 선생님은 나와 사진을 번갈아 쳐다보시더니, “허, 넙떡하이 해가지고 사제끼리 잘 노는구먼… 엣따, 이거나 먹어라.” 하면서 사진 뒷면에 ‘師弟同行(사제동행)’이라고 쓰고는 따로 ‘大風起兮 雲飛揚(대풍기혜 운비양)’이라는 글귀를 적어주셨다. 당시엔 무슨 뜻인지는 잘 몰랐으나 글씨는 달필이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날을 비(飛)’자를 길게 내려그은 것이 보기에 멋이 있었다. 언젠가 수업 중에 선생님은 “남자가 ‘날을 비(飛)’ 자를 잘 쓰면 바람기가 있어 女難(여난)을 당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이 ‘飛’자를 이렇게 잘 쓰시는 걸 보니 선생님이야말로 바람기가 많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나는 선생님의 이 말씀을 명심하고 남몰래 ‘날을 비’ 자를 열심히 연습하여 그 후 일필휘지로 멋지게 쓸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으나, 기대하였던(?) 女難(여난)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짓말쟁이 같은 선생님!
그렇긴 해도 졸업 후 이 글귀는 내게 굉장히 요긴한 쓰임이 되었다. 여기저기 모임에 가서 갑자기 방명록에 사인을 해야 할 경우에 뜻도 모르면서 이 글귀를 왕휘지 필법으로 일필휘지하고는 유식한 체하였다. 그 후 사마천의 史記(사기)를 읽다가 이것이 한고조 유방이 항우를 이겨 천하를 제패한 후 고향에 돌아가 지었다는 그 유명한 ‘大風歌’(대풍가)의 첫 구절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선생님이 왜 이런 글귀를 적어주셨는지 뜻을 새겨보곤 한다. 그것이 “세상에 나가 큰 뜻을 세워 성취하라”는 과분한 기대요, 격려였다면 오늘의 내 모습이 부끄러울 뿐이다. 다음에 대풍가의 그 전문을 선생님이 사랑한 시조의 형식을 빌어 옮겨 본다.
大風起兮 雲飛揚 큰바람 일어나니 구름이 드날리네
威加海內兮 歸故鄕 천하를 얻어 고향에 돌아왔으나
安得猛士兮 守四方 어쩌면 동량재 얻어 이 천하를 지키리
『청조인』 2002년 10월(163호)
2001년 4월 호부터 연재되어 동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故 박구하 동문(18회)의 '그때 그시절, 그리운 이야기들 - 청조만담'을 리바이벌 연재합니다.
박 동문은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한일은행, 부산은행 지점장과 (주)기아인터트레이드 대표이사를 역임하였습니다. 계간 『시조문학』 추천으로 등단하여 시조시인으로 활동하였고, 계간 『시조문학』 편집인을 지내던 중 2008년 작고하였습니다. (편집자주)
아름다운 욕쟁이 시인, 살매 김태홍 선생님
홀아비 부산고의 영원한 파트너, 과부 경남여고 교정에는 우리나라 여성상의 사표로서 신사임당의 좌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 碑面(비면)에는 뜻밖에 살매 김태홍 선생의 다음 시가 새겨져 있다.
“착한 딸들이여,
보람은 여름하여
미쁜 아내 일이라
갸륵한 어머니 일이라
하여
물처럼 슬기로운 평범
길을 여는 빛으로 황홀하리라”
어떤 연유로 이 시가 거기에 새겨져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은사의 시가 모교 인근의 여학교의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살매는 김태홍 선생의 아호다. 선생님은 우리 재학 당시 안장현 선생님과 같이 문단의 현역 시인이셨다. 두 분은 동인 활동도 같이 할 정도로 가까웠다. 살매 선생은 얼굴은 호박처럼 쭈글쭈글하셨지만 마음은 비단같이 매끌매끌하셨다. 겉으로 정나미 떨어지는 ‘소리’(말이 아님!)를 예사로 해대는 셈치고는 매우 자상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분이셨다.
늘 공부에만 매달려 점수 따기에 혈안이 된 우리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하셨다. 그 왕방울 같은 눈을 굴리며 우리더러 “이 졸렬한 놈들아, 먼저 사람이 되는 것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보다 급하다”고 하시면서 재빠른 토끼보다 여유 있는 거북이 되기를 바라셨다. 또, 남자는 졸렬하거나 융통성 없이 살아서는 안 된다 하시면서 세상은 가정이 기본이므로 우리더러 이다음에 결혼해서도 “딸하고 댄스를 출 수 있을 만큼 동심을 지닌 아버지가 되라”고 하셨다. 그러면 마누라가 바가지를 긁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어느 싱거운 놈이 질문을 하자 대뜸 “남자는 여자가 절대로 바가지를 긁게 해서는 안 된다… 안 되면 폭력으로라도!” 하고 대답하셨다. 바가지를 긁지 않게끔 평소 돈을 잘 벌어 주던가 사랑을 잘 해주라는 뜻이겠지만 우리는 시인의 입에서 거침없이 나오는 ‘폭력불사’라는 말이 의외였다. 그래도, 그때는 왠지 폭력적으로 들리지 않고 멋있게 들렸다.
나와 너 외엔 모두가 우수마발(牛溲馬勃)
선생님은 우리 3학년 5반을 한마디로 ‘우수마발’이라고 평하셨다. 이 말은 그때 국어 교과서에 실린 양주동 박사의 ‘면학의 서’라는 글에서 “내가 일인칭(一人稱), 너는 이인칭(二人稱), 나와 너 외엔 우수마발(牛溲馬勃)이 다 삼인칭야(三人稱也)라.” 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그때는 새로 배운 이 말이 꽤 멋이 있어 학생들 사이에 서로 “야, 이 우수마발아!” 하고 부를 정도로 유행하였는데 이를 선생님이 역이용하신 것이다. 양주동 박사는 다 아다시피 박학다식한 재사로 우리는 그의 글에서 ‘박이부정(博而不精)’이니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함’이라는 현학적이고 고투적인 어법이 생경하면서도 참신한 표현같이 느껴졌다. 선생님은 그 양주동이 옛 부산일보사 앞을 지나가다가 차에 치일 뻔했을 때, “(자신을 가리켜) 국보 죽을 뻔했다!”라고 했다는 일화를 들려주기도 하셨다. 거들먹거리는 거야 취할 바가 없다 하겠지만 면학에 의한 자신감을 가지는 것은 배울 만한 것이다. ‘우수마발’이란 사전적으로 소오줌과 말똥이라는 뜻으로서 가치 없는 모든 것을 이름인데 오줌과 똥은 거름으로도 쓰는 것이니 평범한 가운데 비범을 보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살매 선생은 속정과는 다르게 겉으로는 굉장한 독설가였다. 거의 입만 열면 욕이었다. 훈시든, 강의든 욕에서 시작하여 욕으로 끝이 난다. 그의 3대 단골 욕설메뉴는 ‘식티이 거튼 놈들, 빙씨이 거튼 놈들, 잠충이 거튼 놈들’이었다. 또 ‘졸렬하다’는 단어를 된소리로 발음하며 입에 달고 다니셨는데 우리는 이를 빗대어 유명한 데카르트의 명제 ‘Cogito ergo Sum’을 흉내내어 “우리는 졸렬하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웃고는 하였다. 수업 중 국어 문제를 풀 때도 답안을 두고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이거는 입시 문제치고는 어데? 찌극히 쫄렬하다. 고만 해!” 하고 책을 탁 접고 급하면 인사도 안 받고 나가버린다. 이것이 멋인가, 오줌인가, 똥인가. 그 뒷모습이 ‘찌극히’ 불량하다고 생각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저세상에 가셨단다. 저승도 차 놓칠세라 그리 빨리 가셨나. 빙충이 같은 선생님!
날을 飛(비)자를 잘 쓰면 바람기가 있어
살매 선생은 1925년 경남 창원에서 출생하여 해인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경남여고(1954년 1년간 근무), 부산고 등 고교 교사를 거쳐 국제신보, 부산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하였고, 1985년 부산 충렬고교 교장 재직 중 과로로 별세하셨다. 시집으로 『땅과 장미와 시』, 『창』, 『조류의 합창』, 『당신이 빛을』 등이 있는데, 자유시를 쓰면서도 시보다는 우리 민족의 고유 정형시인 시조에 대하여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계셨다. 1970년대 부산시 교육연구원장으로 재직 시 관내 중·고등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일정 기간에 걸쳐 주기적으로 시조 수 편씩을 써내게 하는 등 시조 교육과 보급 운동에 크게 기여하신 분이다. 이렇게 살매 선생은 부산 시조 발전에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서 박달수(부산시조시인협회장), 임종찬(부산대 교수), 전연희(부일여중 교감) 등 지금 부산의 많은 시조 시인들이 살매 선생의 시조 부흥운동을 통하여 배출되었 다고 한다. 어떤 뜻에서 그리 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러한 노력이 지금 크게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을 볼 때 나도 시조를 쓰는 한 사람으로서 기쁘기 그지없다.
●삽화 - 박세형(24회)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
선생님에 대한 글을 쓰면서 지금 황급히 기억나는 것이 있다. 그날, 3학년 2학기 마지막 수업을 끝내시고는 “다들 잘 살아라.” 하고 유언처럼 한마디 하고는 도사처럼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선생님은 우리를 향해 “졸업 기념으로 사인(sign)을 해 줄 테니 뭐든지 갖고 나오라.”고 하셨다. 아이들은 시인 선생님이 사인을 해 준다고 하니 다투어 기념될 만한 것을 들고 나가 친필 사인을 받았다. 나도 마침 유수현 담임 선생님과 교정에서 찍었던 사진 두 장을 들고 나갔는데 살매 선생님은 나와 사진을 번갈아 쳐다보시더니, “허, 넙떡하이 해가지고 사제끼리 잘 노는구먼… 엣따, 이거나 먹어라.” 하면서 사진 뒷면에 ‘師弟同行(사제동행)’이라고 쓰고는 따로 ‘大風起兮 雲飛揚(대풍기혜 운비양)’이라는 글귀를 적어주셨다. 당시엔 무슨 뜻인지는 잘 몰랐으나 글씨는 달필이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날을 비(飛)’자를 길게 내려그은 것이 보기에 멋이 있었다. 언젠가 수업 중에 선생님은 “남자가 ‘날을 비(飛)’ 자를 잘 쓰면 바람기가 있어 女難(여난)을 당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이 ‘飛’자를 이렇게 잘 쓰시는 걸 보니 선생님이야말로 바람기가 많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나는 선생님의 이 말씀을 명심하고 남몰래 ‘날을 비’ 자를 열심히 연습하여 그 후 일필휘지로 멋지게 쓸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으나, 기대하였던(?) 女難(여난)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짓말쟁이 같은 선생님!
그렇긴 해도 졸업 후 이 글귀는 내게 굉장히 요긴한 쓰임이 되었다. 여기저기 모임에 가서 갑자기 방명록에 사인을 해야 할 경우에 뜻도 모르면서 이 글귀를 왕휘지 필법으로 일필휘지하고는 유식한 체하였다. 그 후 사마천의 史記(사기)를 읽다가 이것이 한고조 유방이 항우를 이겨 천하를 제패한 후 고향에 돌아가 지었다는 그 유명한 ‘大風歌’(대풍가)의 첫 구절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선생님이 왜 이런 글귀를 적어주셨는지 뜻을 새겨보곤 한다. 그것이 “세상에 나가 큰 뜻을 세워 성취하라”는 과분한 기대요, 격려였다면 오늘의 내 모습이 부끄러울 뿐이다. 다음에 대풍가의 그 전문을 선생님이 사랑한 시조의 형식을 빌어 옮겨 본다.
大風起兮 雲飛揚 큰바람 일어나니 구름이 드날리네
威加海內兮 歸故鄕 천하를 얻어 고향에 돌아왔으나
安得猛士兮 守四方 어쩌면 동량재 얻어 이 천하를 지키리
『청조인』 2002년 10월(16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