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 호부터 연재되어 동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故 박구하 동문(18회)의 '그때 그시절, 그리운 이야기들 - 청조만담'을 리바이벌 연재합니다.
박 동문은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한일은행, 부산은행 지점장과 (주)기아인터트레이드 대표이사를 역임하였습니다. 계간 『시조문학』 추천으로 등단하여 시조시인으로 활동하였고, 계간 『시조문학』 편집인을 지내던 중 2008년 작고하였습니다. (편집자주)
염불보다 더 좋은 젯밥
정진헌 선생님은 우리가 2학년 때 부산상고에서 전근 오셨는데 외모를 보면 실례지만 작달막한 키, 배불뚝이에 대머리가 홀라당 까져 한마디로 아무도 주워가지 않을 버려진 것들로만 이루어진 집합체 같았다. 우리에게 수학(대수)을 가르치셨지만 지독한 일본식 발음에다 말투 또한 투정부리거나 응석부리는 듯하여 학생들에게 좋은 놀림감(?)이었다. 별명이 “쪼쪼”였는데 별명만 들어도 대충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선생님은 특이하게도 취미가 야구 감상이었는데, 당시 일본 프로 야구의 동정을 손금보듯 훤히 꿰고 있었다. 내가 1학년 시절 서면 부산상고 앞(지금 롯데호텔) 복개천변에 있던 “서울산부인과”에 가정교사로 잠시 있을 때 일인데, 웬 대머리 까진 양반이 휴일만 되면 이 집에 놀러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으나 뒤에 알고 보니 부산상고 선생님이신데 야구를 보러 주말마다 오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집만이 이 일대에서는 유일하게 일본 안테나를 설치한 대형 TV가 있어 이 양반이 공짜로 일본프로야구 중계를 보고 간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서로 모르는 사이라 알은 체를 아니했지만 그 후 뜻밖에도 우리 학교에 오신 것이다. 그 전력을 아는 우리는 수학 공부가 좀 지루하다 싶으면 슬며시 “오늘 날씨도 그런데 새앰~요 야구합시더.” 하고 졸랐다. 특히 손태완(서면 삼성의원 원장)이가 늘 발동을 걸곤 했는데, 그러면 선생님은 못이기는 체 하고 “이거 이래도 개안캤습니꺼?, 이거 이라모 안 되는데…” 하면서도 당신이 더 야구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셨다.
대머리 야구광 정진헌 선생님
우선, 칠판에 일본의 양대 리그인 퍼시픽(Pacific) 리그와 센트랄(Central) 리그를 대칭으로 그려 놓고 재일교포 강타자 장훈(張勳) 선수가 나오는 도에이(東映)팀과 세기의 피처 가네다(金田正日)가 활약하는 거인(자이언츠)팀을 번갈아 가리키며 입에 거품을 무신다. 팀 성적에서 소속 선수의 타격 자세, 타율, 타점, 삼진과 승률, 전망 등을 줄줄이 왼다. 그러면서 당대 최고의 타격왕이며 안타제조기라는 별칭을 가진 장훈 선수와 그 모친의 애국심, 당대 최고의 투수인 한국 출신의 가네다의 활약상과 그의 귀화 이야기를 비교해 가면서 민족 감정을 이야기도 하고, 나가시마(永島)와 왕정치의 발군한 성적, 고시엔(甲子園) 일본고교야구시합 소식과 당시 우리나라에서 갓 건너간 강타자 백인천은 아직 맥도 못 추는 초년병으로 2군에서 활약하는 정도라고 알려준다.
당시 부산고교는 16회 김소식, 박명렬, 하일, 최영무 등이 전국고교야구를 제패한 이래 야구는 교과목의 일부가 될 정도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때는 이 “쪼쪼” 선생님의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야구를 더 잘 이해하려고 나는 아시아의 타격왕 박현식 씨가 쓴 『야구 교본』책을 사서 재독 삼독하며 두고두고 읽었다. 아마도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야구에 대한 잡학 지식은 이 책과 “쪼쪼” 선생님의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부 배운 것은 기억이 안 나고 이런 것들만 기억이 나니 한심한 제자 같아 송구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겨우 생각난다는 것이 선생님의 험담 같은 이야기 나부랭이들인데 그 또한 그리운 마음에 적어보기 로 한다. 그 선생님의 강의 한 대목,
“… 에에, 여기서 그라모 뭐시 됩니까? 루도 삼엑수 이꼬루 요것이 0에 같기나 같지 않을 때, 원 0에 내접합니까, 안 합니까?…”
한참 야구 이야기를 하다가 수업 시간 끝 무렵이 되면 허겁지겁 칠판에 복잡한 수식을 옮겨 적고 설명을 해 대는데 우리 같이(상상의 세계에서나마) 부산에서 일본 동경까지 야구하러 갔다가 소주 한 잔 안 마시고 그냥 못 돌아오는 부류들은 그 설명들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전천후 직사포 시인 안장현 선생님
2학년 어느 봄날, 아침 조회 시간에 추월영 교장이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삼십대 청년 선생 한 분을 소개하셨다.
“오늘 여러분에게 서울에서 오신 유명한 시인을 소개하겠습니다. 바로 안장현 선생입니다.” 이어 등단한 젊은 선생은 보통 누구나 하는 부임 인사말 즉, “전통 있고 실력 있는 부산고에 오게 되어 어쩌고…” 하는 말은 하나도 없이 그냥 “바다가 그리워서” 서울을 버리고 부산으로 전출을 희망하여 내려오셨다고 했다. 우리는 이 말 한마디에 시쳇말로 뽕 갔다. 조회가 끝나자마자 그분이 2층 목조 교실이던 우리 반에 국어 선생으로 들어오시는 게 아닌가. 아아, 시인이 우리 선생님이라니 감격에 벅찼다. 그때만 해도 시인은 무조건적 존경의 대상이었다. 시인이라면 무언가 환상적이고 여성적이고 시적일 것이 아닌가.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그런데 수 분도 못 되어 그 기대는 무참히 깨어졌다. 선생님은 도저히 시인으로서는 걸맞지 않는 크고 도도한 목소리로 책은 펴지도 않고 정치,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 사자후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한 시간 내내 떠드시는데 그런 식으로는 며칠 못 갈 거라고 우리는 수군거렸으나 어데로, 1년 내내 그 수위 그대로였다. 수업이 끝날 때 우리는 으레 박수를 쳤고, 참으로 우리나라는 못 된 나라이고 왜 저런 훌륭한 분이 국회에 안 가시고 교사가 되셨는지 의아스러웠다.

●삽화 - 박세형(24회)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
교과서 수업보다는 까뮈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논하고, T S 엘리엇의 시를 강의하시는데 거침이 없으셨다. 엘리엇의 대표작 「황무지」의 첫 행인 “April is the cruelest month.”를 “사월은 가장 무정한 달”이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말씀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심 수긍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그 다음 행에 “불모의 땅에서 라일락을 꽃피게 하고/ 추억과 정욕을 뒤섞어 봄비로/ 깊은 뿌리를 깨어나게 한다/ 겨울이 차라리 따스했거니…”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죽이거나 죽임을 당한 땅에서 그 피로 새 생명의 꽃을 피우게 하는 사월은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 이것을 여성적 感性語(감성어)인 “무정한” 것으로 순화시켜 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다소 과격하지만 “殘忍”이라는 말이 우리에게도 있는 이상 “잔인”하다고 번역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에게 4·19는 잔인했으면 잔인했지 무정한 것이 아니었듯이 1차 대전 이후 황폐해진 것은 땅만 아니라 사람의 정신이며 이를 영탄이나 방탕이 아닌 정면 돌파로 극복해 내려 했던 엘리엇의 처절한 시 정신으로 봐서도 그리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일개 학생으로서 하늘같은 선생님 앞에서 감히 반론할 수는 없었다. 이미 시집을 두 권이나 내셨고 『달에게 묻는다』라는 수필집도 그 때 나왔는데 나도 없는 돈에 한 권을 사서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 책은 어디 갔는지 없어졌으나 많은 부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의 글이 너무나 서정적이고 美文이어서 나에게는 두고두고 글짓기에 전범이 되었다.
선생님은 한마디로 불의를 못 참는 치열한 성격이셨고, 강한 동기가 없이는 붓을 들지 않는다는 지론처럼 시 또한 미적지근한 것을 나는 지금까지 한편도 못 보았다. 대표작인 「전쟁」을 보면 “겨누는 것은/ 분명히 적이라는데/ 적이 아니라/ 그것은 나다// 포탄은 터져 날아갔는데/ 적의 심장을 뚫었다는데// 죽은 놈도/ 자빠진 놈도/ 그것은 나다.” 라거나 “모든 것은 앓는다/ 지금은// 그래서 사람들은 가고/ 그래서 사람들은 오고// 앓지 않고는 벗길 수 없는/ 앓지 않고는 찾을 수 없는…” 라는 시가 그렇다. 이러한 성정을 가지신 분이니까 교내 백일장에서 표절작이 나왔을 때 그냥 넘어갈 수 있었겠는가. 불같은 성격에서 선생님이 그 원인 제공자 전득만(18회 동기회 총무) 군을 혼내준 이야기는 과월호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때 문예반 출신 이경형(대한매일 논설위원실장) 등 6명은 지난 2002년 5월 8일 졸업 후 처음으로 안 선생님(75세)을 모시고 서울 인사동의 한식집 은정에서 식사를 함께 하면서 오랜만에 묵은 얘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선생님은 아직도 한글문예 이사장을 맡고 계시는데 뇌경색 후유증으로 머리가 어지러워 문필 활동은 못한다고 하신다. 그래도 말씀만은 예나 다름없이 카랑카랑하셨다. 이 <청조인>지가 오면 제일 먼저 “청조만담”을 보시는데 어떤 때는 두 번씩 읽는다고 하시며 계속 좋은 글을 써달라고 하셨다. 그날 우리는 돌아가며 선생님의 시 작품을 낭송하였고, 답으로 선생님은 「보다 낮은 목소리로」라는 근작시를 낭송해 주셨다. 실로 근 40년 만의 사제간 동석동락의 한때였다. 김선학(16회 · 문학평론가) 동문에 의하면, 선생님이 문예반 주임으로 계신 3년 동안 부고 사상 가장 많은 문인들이 배출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만큼 선생님의 자리가 컸다는 반증일 게다.
『청조인』 2002년 9월(162호)
2001년 4월 호부터 연재되어 동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故 박구하 동문(18회)의 '그때 그시절, 그리운 이야기들 - 청조만담'을 리바이벌 연재합니다.
박 동문은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한일은행, 부산은행 지점장과 (주)기아인터트레이드 대표이사를 역임하였습니다. 계간 『시조문학』 추천으로 등단하여 시조시인으로 활동하였고, 계간 『시조문학』 편집인을 지내던 중 2008년 작고하였습니다. (편집자주)
염불보다 더 좋은 젯밥
정진헌 선생님은 우리가 2학년 때 부산상고에서 전근 오셨는데 외모를 보면 실례지만 작달막한 키, 배불뚝이에 대머리가 홀라당 까져 한마디로 아무도 주워가지 않을 버려진 것들로만 이루어진 집합체 같았다. 우리에게 수학(대수)을 가르치셨지만 지독한 일본식 발음에다 말투 또한 투정부리거나 응석부리는 듯하여 학생들에게 좋은 놀림감(?)이었다. 별명이 “쪼쪼”였는데 별명만 들어도 대충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선생님은 특이하게도 취미가 야구 감상이었는데, 당시 일본 프로 야구의 동정을 손금보듯 훤히 꿰고 있었다. 내가 1학년 시절 서면 부산상고 앞(지금 롯데호텔) 복개천변에 있던 “서울산부인과”에 가정교사로 잠시 있을 때 일인데, 웬 대머리 까진 양반이 휴일만 되면 이 집에 놀러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으나 뒤에 알고 보니 부산상고 선생님이신데 야구를 보러 주말마다 오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집만이 이 일대에서는 유일하게 일본 안테나를 설치한 대형 TV가 있어 이 양반이 공짜로 일본프로야구 중계를 보고 간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서로 모르는 사이라 알은 체를 아니했지만 그 후 뜻밖에도 우리 학교에 오신 것이다. 그 전력을 아는 우리는 수학 공부가 좀 지루하다 싶으면 슬며시 “오늘 날씨도 그런데 새앰~요 야구합시더.” 하고 졸랐다. 특히 손태완(서면 삼성의원 원장)이가 늘 발동을 걸곤 했는데, 그러면 선생님은 못이기는 체 하고 “이거 이래도 개안캤습니꺼?, 이거 이라모 안 되는데…” 하면서도 당신이 더 야구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셨다.
대머리 야구광 정진헌 선생님
우선, 칠판에 일본의 양대 리그인 퍼시픽(Pacific) 리그와 센트랄(Central) 리그를 대칭으로 그려 놓고 재일교포 강타자 장훈(張勳) 선수가 나오는 도에이(東映)팀과 세기의 피처 가네다(金田正日)가 활약하는 거인(자이언츠)팀을 번갈아 가리키며 입에 거품을 무신다. 팀 성적에서 소속 선수의 타격 자세, 타율, 타점, 삼진과 승률, 전망 등을 줄줄이 왼다. 그러면서 당대 최고의 타격왕이며 안타제조기라는 별칭을 가진 장훈 선수와 그 모친의 애국심, 당대 최고의 투수인 한국 출신의 가네다의 활약상과 그의 귀화 이야기를 비교해 가면서 민족 감정을 이야기도 하고, 나가시마(永島)와 왕정치의 발군한 성적, 고시엔(甲子園) 일본고교야구시합 소식과 당시 우리나라에서 갓 건너간 강타자 백인천은 아직 맥도 못 추는 초년병으로 2군에서 활약하는 정도라고 알려준다.
당시 부산고교는 16회 김소식, 박명렬, 하일, 최영무 등이 전국고교야구를 제패한 이래 야구는 교과목의 일부가 될 정도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때는 이 “쪼쪼” 선생님의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야구를 더 잘 이해하려고 나는 아시아의 타격왕 박현식 씨가 쓴 『야구 교본』책을 사서 재독 삼독하며 두고두고 읽었다. 아마도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야구에 대한 잡학 지식은 이 책과 “쪼쪼” 선생님의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부 배운 것은 기억이 안 나고 이런 것들만 기억이 나니 한심한 제자 같아 송구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겨우 생각난다는 것이 선생님의 험담 같은 이야기 나부랭이들인데 그 또한 그리운 마음에 적어보기 로 한다. 그 선생님의 강의 한 대목,
“… 에에, 여기서 그라모 뭐시 됩니까? 루도 삼엑수 이꼬루 요것이 0에 같기나 같지 않을 때, 원 0에 내접합니까, 안 합니까?…”
한참 야구 이야기를 하다가 수업 시간 끝 무렵이 되면 허겁지겁 칠판에 복잡한 수식을 옮겨 적고 설명을 해 대는데 우리 같이(상상의 세계에서나마) 부산에서 일본 동경까지 야구하러 갔다가 소주 한 잔 안 마시고 그냥 못 돌아오는 부류들은 그 설명들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전천후 직사포 시인 안장현 선생님
2학년 어느 봄날, 아침 조회 시간에 추월영 교장이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삼십대 청년 선생 한 분을 소개하셨다.
“오늘 여러분에게 서울에서 오신 유명한 시인을 소개하겠습니다. 바로 안장현 선생입니다.” 이어 등단한 젊은 선생은 보통 누구나 하는 부임 인사말 즉, “전통 있고 실력 있는 부산고에 오게 되어 어쩌고…” 하는 말은 하나도 없이 그냥 “바다가 그리워서” 서울을 버리고 부산으로 전출을 희망하여 내려오셨다고 했다. 우리는 이 말 한마디에 시쳇말로 뽕 갔다. 조회가 끝나자마자 그분이 2층 목조 교실이던 우리 반에 국어 선생으로 들어오시는 게 아닌가. 아아, 시인이 우리 선생님이라니 감격에 벅찼다. 그때만 해도 시인은 무조건적 존경의 대상이었다. 시인이라면 무언가 환상적이고 여성적이고 시적일 것이 아닌가.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그런데 수 분도 못 되어 그 기대는 무참히 깨어졌다. 선생님은 도저히 시인으로서는 걸맞지 않는 크고 도도한 목소리로 책은 펴지도 않고 정치,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 사자후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한 시간 내내 떠드시는데 그런 식으로는 며칠 못 갈 거라고 우리는 수군거렸으나 어데로, 1년 내내 그 수위 그대로였다. 수업이 끝날 때 우리는 으레 박수를 쳤고, 참으로 우리나라는 못 된 나라이고 왜 저런 훌륭한 분이 국회에 안 가시고 교사가 되셨는지 의아스러웠다.
●삽화 - 박세형(24회)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
교과서 수업보다는 까뮈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논하고, T S 엘리엇의 시를 강의하시는데 거침이 없으셨다. 엘리엇의 대표작 「황무지」의 첫 행인 “April is the cruelest month.”를 “사월은 가장 무정한 달”이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말씀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심 수긍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그 다음 행에 “불모의 땅에서 라일락을 꽃피게 하고/ 추억과 정욕을 뒤섞어 봄비로/ 깊은 뿌리를 깨어나게 한다/ 겨울이 차라리 따스했거니…”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죽이거나 죽임을 당한 땅에서 그 피로 새 생명의 꽃을 피우게 하는 사월은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 이것을 여성적 感性語(감성어)인 “무정한” 것으로 순화시켜 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다소 과격하지만 “殘忍”이라는 말이 우리에게도 있는 이상 “잔인”하다고 번역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에게 4·19는 잔인했으면 잔인했지 무정한 것이 아니었듯이 1차 대전 이후 황폐해진 것은 땅만 아니라 사람의 정신이며 이를 영탄이나 방탕이 아닌 정면 돌파로 극복해 내려 했던 엘리엇의 처절한 시 정신으로 봐서도 그리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일개 학생으로서 하늘같은 선생님 앞에서 감히 반론할 수는 없었다. 이미 시집을 두 권이나 내셨고 『달에게 묻는다』라는 수필집도 그 때 나왔는데 나도 없는 돈에 한 권을 사서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 책은 어디 갔는지 없어졌으나 많은 부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의 글이 너무나 서정적이고 美文이어서 나에게는 두고두고 글짓기에 전범이 되었다.
선생님은 한마디로 불의를 못 참는 치열한 성격이셨고, 강한 동기가 없이는 붓을 들지 않는다는 지론처럼 시 또한 미적지근한 것을 나는 지금까지 한편도 못 보았다. 대표작인 「전쟁」을 보면 “겨누는 것은/ 분명히 적이라는데/ 적이 아니라/ 그것은 나다// 포탄은 터져 날아갔는데/ 적의 심장을 뚫었다는데// 죽은 놈도/ 자빠진 놈도/ 그것은 나다.” 라거나 “모든 것은 앓는다/ 지금은// 그래서 사람들은 가고/ 그래서 사람들은 오고// 앓지 않고는 벗길 수 없는/ 앓지 않고는 찾을 수 없는…” 라는 시가 그렇다. 이러한 성정을 가지신 분이니까 교내 백일장에서 표절작이 나왔을 때 그냥 넘어갈 수 있었겠는가. 불같은 성격에서 선생님이 그 원인 제공자 전득만(18회 동기회 총무) 군을 혼내준 이야기는 과월호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때 문예반 출신 이경형(대한매일 논설위원실장) 등 6명은 지난 2002년 5월 8일 졸업 후 처음으로 안 선생님(75세)을 모시고 서울 인사동의 한식집 은정에서 식사를 함께 하면서 오랜만에 묵은 얘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선생님은 아직도 한글문예 이사장을 맡고 계시는데 뇌경색 후유증으로 머리가 어지러워 문필 활동은 못한다고 하신다. 그래도 말씀만은 예나 다름없이 카랑카랑하셨다. 이 <청조인>지가 오면 제일 먼저 “청조만담”을 보시는데 어떤 때는 두 번씩 읽는다고 하시며 계속 좋은 글을 써달라고 하셨다. 그날 우리는 돌아가며 선생님의 시 작품을 낭송하였고, 답으로 선생님은 「보다 낮은 목소리로」라는 근작시를 낭송해 주셨다. 실로 근 40년 만의 사제간 동석동락의 한때였다. 김선학(16회 · 문학평론가) 동문에 의하면, 선생님이 문예반 주임으로 계신 3년 동안 부고 사상 가장 많은 문인들이 배출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만큼 선생님의 자리가 컸다는 반증일 게다.
『청조인』 2002년 9월(16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