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수난 이야기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아이들은 모자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요즘 미국 프로야구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박찬호도 한 때 그의 옷이 동료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진 일이 있었다. 그처럼 멤버의 일원이 된데 대한 축하의 뜻은 아니지만. 어떤 구속에 대한 해방감에서 모자를 찢었다.
요즘은 개성시대라 모자 같은 것이 거의 없어져 버렸지만 우리 때는 학생에게 모자는 필수적이었다. 고교의 굴레를 벗는 것은 모자를 벗는 일로 시작된다. 모자는 쓰고 있는 한 공동체 속의 일원으로서 늘 규율과 단속의 표적이 된다. 이제는 수난의 표적이 된 모자이다. 졸업반에게는 학교는 매일매일 다르게 느껴진다. 실제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강박감 같은 게 있었다.
그 수난의 첫 타자가 바로 교모이다. 중 · 고교 6년 동안 써왔던 지긋지긋한 모자! 매일 이 책상. 저 책상에서 멀쩡한 모자가 북북, 찢겨져 나갔다. 제 주인에게 당하는 놈도 있지만 대부분 타인에 의해 칼로 십자가를 받거나 별꼴을 당했다.
분노와 환호, 애환을 함께해 온 모자
교모는 학생이면 누구나 등, 하교시에 제일 먼저 챙겨야할 소도구이다. 모자는 교무실이든 식장이든 들어가기 전에 저도 모르게 손이 간다. 늘 나사를 돌려 모표를 똑바로 세우고, 호흡을 가다듬던 모자. 창피하거나 외면할 일이 있을 때에는 창을 당겨 눈길을 피하게 해 주었던 모자. 학생 데모나 뜨거운 야구장에서 분노와 환호의 표시로 공중을 날던 모자! 생각해보면, 모자만큼 우리와 애환을 같이 한 추억물이 있겠는가.
모자는 우리에게 소속감과 일체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부고인임을 자부하게 해준 일등 공신이었다. 그런데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할 모자를 두고 그 때는 왜 그리 다투어 학대했는지 모르겠다.
하복은 그 마지막 입던 날 대부분 자기 옷을 자기가 찢어 발겼지만 교모는 남들이 그 임자 몰래 칼 자국을 내는 것이 유행이었다. 학생이라면 모름지기 책가방이든 교복이든 모자든 깨끗하고 단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저학년 때의 이야기이고, 졸업반들에게는 남의 동네 이야기이다. 뭐든지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찢어지고 깨지고 비뚤어져야 정산인 것이다. 요새 젊은이들은 제 키보다 큰 옷을 입고 다니거나, 멀쩡한 옷을 찢어 입는다든지 남자도 한쪽 귀를 뚫어 귀고리를 하고 다니는 것들은 다 전통이나 어떤 틀 속에 均濟(균제)됨을 거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입시가 코앞에 걸린 고3생들은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 성숙과 미성숙, 구속과 자유가 엇갈리는 생의 언저리에서 학생들이 손쉽게 티를 내거나 경계를 허물 수 있는 것이 고작 교복이나 교모 정도가 아니었겠는가.
모자는 대체로 모범적이고 얌전한 아이의 것일수록 그 겪는 수난의 정도가 심했다. 모자의 상태가 양호할수록 찢는 재미가 솔솔했으므로 '모자'하면 정영일 군이 생각난다.
그는 뒤에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는데 박정희의 유신시절, 동아투위로 신문사를 쫓겨 나와 방황하다가 먹고 살 게 없어서 뒤늦게 사법시험에 도전하여 합격하였다. 나와는 5반의 투 톱으로 여겨질 만큼 담임의 사랑을 받았는데 지금은 꽤 강단있는 변호사로 통하지만 당시에는 얌전하고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그의 모자가 할복 당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삽화 - 박세형(24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만화학과 교수
"지난 시월 어느 날, 무명 흉한의 난도질로 할복을 당한 내 모자다. 물론 이건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순간 나는 나의 생명의 일부 혹은 전체에 어떤 위협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현장에 있어서 그 비운을 구하지 못한 것이 내 못난 탓이라 하겠지만 내가 그 모자의 참변을 더욱 애통해 하는 까닭은 좀 더 다른 데 있다.
그 까닭이란 '내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것이 '남의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는 데 한없는 애착을 느낀다는 말이다. 만약 '내 것'이 아니고 이웃 놈의 것이었다면 한바탕 웃어주고 그 흉한의 기분을 이해해 주려고 노렸했을는지도 모른다...(중략)
모자로 하여 공동체 속의 '나'를 느낄 때가 있다. 공동체 속의 내가 중요하듯이 공동체 역시 중요가치를 가진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그 속에 '나'는 대립되는 문제이다. 어느 한쪽의 존재가치를 지나치게 옹호한 나머지 전체를 어지럽히고 자신까지 파탄으로 이끈 예는 허다하다. 남의 일에 관해서는 정확한 판단을 휘두르지만 자신이 그 일에 관련될 때는 명확한 판단력을 잃는다. 넝마 쪼가리처럼 악취가 진동하는 헌데 투성이를 관이랍시고 머리 위에 모셔 다니는 나의 몰골을 과연 인류 영장의 위신으로 용서할 수 있겠는가? ... 그 녀셕은 앞으로 두어 달이면 모자 이야기를 안 해도 좋게 되겠지만, 우리에게는 몇 천 번의 두어 달이 지나야 정녕 좋은 날이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오늘 저녁은 만신창이가 된 내 모자를 졸업하는 그날까지 걸치고 다닐 수 있게 기우려면 눈웃음을 몇 번쯤 아끼지 않아야 하리라.(1964년 11.29)"
이것은 당시 유수지에 실린 글을 발췌한 것이다. 그가 애착한 모자는 사연이 있었다. 그 모자는 그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 어머니가 온 국제시장을 다 뒤진 끝에 사준 것이어서 특별히 애착이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장장 5년 10개월 간 그 신장 5척 5촌에 헨조카(編上靴, *군화) 1촌 반을 보탠 머리 위에 쓰고 풍상을 이겨내며 다녔으니 그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역대 가보로 남기려고 한 그의 깊은 뜻을 몰라준 '흉한'이 얼마나 미웠으랴. 그 '내 것'을 침해당한지 37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난도질당하여 뒤에 기워 쓰고 다녔다는 그 모자를 보관하고 있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다. 그냥 넘겨버릴 범상한 이야기를 '내 것'이 남에 의해 침해당한 일을 계기로 그 생각을 공동체와 자신의 문제로 발전시켜 이 이 정도의 글을 쓸 수 있었던 고교생의 사고력이 놀랍다.
내 모자 건드리는 놈은 "쥑이 뿔기다"
아무튼 당시 이런 식으로 당한 아이들이 하나둘이 아니었으며, 말로 다 안 해서 그렇지 저간의 사정이야 얼마나 곡진한 바가 있었으랴. 지금도 가슴 아픈 것은 최영승(작고)의 경우이다. 그가 하루는 체육시간이 끝나고 돌아오자 책상 속에 고이 모셔두었던 모자가 없어졌다.
누군가 영승이를 만만히 보고 훔쳐간 모양인데 그 순덕이가 화를 내지는 못 하고 "내는, 기부이 대다이 나뿌다이". 하고 두꺼비처럼 눈만 껌뻑거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군대에서도 철모 도둑놈은 없다는데, 찢어지게 가난했던 영승이는 남의 모자를 대신 훔치지도 못하고 까까중 맨머리로 "안 주나, 안주나, 오늘도 안주나, 줘 바라 머라카나, 안주모 가마 인나바라"하고 '주나 바라' 염불만 하면서 학교에 다녔으나 끝내 돌려 받지는 못하였다. 그 모자 훔쳐간 놈,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으면 제발 그 모자 좀 그 영전에 돌려주시게. 이제는 처벌 시효도 다 지났으니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날이 갈수록 수난을 당하는 아이들은 늘어갔다.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로 둔갑하는 가운데 끝까지 모자가 성한 채로 졸업하는 아이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참고로 말씀드리면 내 모자만은 멀쩡했다. 내가 공개적으로 내 모자를 건드리는 놈은 "쥑이 뿔기다"라고 조석으로 눈을 부라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내 모자가 무사했던 것은 내 공갈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모자가 워낙 낡아 앞 창과 뒤 테가 다 헤져 더 난도질 할 데가, 아니 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교복도 단추가 반드시 몇 개는 떨어져 있었고(은사와 찍은 사진에서 증명됨), 2학기부터는 책가방은 아예 없이 책 보따리에 책을 둘둘 말아 싸들고 다녔던 것이다. 지금 보면 나도 꽤나 불량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불량기들은 다 어디서 온 것일까. 세상에 근본 없는 자식이 어디 있으랴. 한번은 담임 유수현 선생님이 늘 입던 추레한 쥐색 양복 대신에 깔깔한 맘모 즈봉을 입고 학교에 나온신 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 당당함에 아연 놀랐다. 아니, 우리가 이런다고 담임 선생님까지 막가시면 안되는데... 학교에서 대표적인 단벌 신사였던 우리 선생님도 이제 과외 공부 학원에 나가시더니 돈 좀 벌었다고 이리 '포때'를 내도 되는 건가_ 복장 문제만큼은 사제가 피장파장이 되었다.
<2025. 3월 호에 계속>
모자 수난 이야기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아이들은 모자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요즘 미국 프로야구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박찬호도 한 때 그의 옷이 동료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진 일이 있었다. 그처럼 멤버의 일원이 된데 대한 축하의 뜻은 아니지만. 어떤 구속에 대한 해방감에서 모자를 찢었다.
요즘은 개성시대라 모자 같은 것이 거의 없어져 버렸지만 우리 때는 학생에게 모자는 필수적이었다. 고교의 굴레를 벗는 것은 모자를 벗는 일로 시작된다. 모자는 쓰고 있는 한 공동체 속의 일원으로서 늘 규율과 단속의 표적이 된다. 이제는 수난의 표적이 된 모자이다. 졸업반에게는 학교는 매일매일 다르게 느껴진다. 실제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강박감 같은 게 있었다.
그 수난의 첫 타자가 바로 교모이다. 중 · 고교 6년 동안 써왔던 지긋지긋한 모자! 매일 이 책상. 저 책상에서 멀쩡한 모자가 북북, 찢겨져 나갔다. 제 주인에게 당하는 놈도 있지만 대부분 타인에 의해 칼로 십자가를 받거나 별꼴을 당했다.
분노와 환호, 애환을 함께해 온 모자
교모는 학생이면 누구나 등, 하교시에 제일 먼저 챙겨야할 소도구이다. 모자는 교무실이든 식장이든 들어가기 전에 저도 모르게 손이 간다. 늘 나사를 돌려 모표를 똑바로 세우고, 호흡을 가다듬던 모자. 창피하거나 외면할 일이 있을 때에는 창을 당겨 눈길을 피하게 해 주었던 모자. 학생 데모나 뜨거운 야구장에서 분노와 환호의 표시로 공중을 날던 모자! 생각해보면, 모자만큼 우리와 애환을 같이 한 추억물이 있겠는가.
모자는 우리에게 소속감과 일체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부고인임을 자부하게 해준 일등 공신이었다. 그런데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할 모자를 두고 그 때는 왜 그리 다투어 학대했는지 모르겠다.
하복은 그 마지막 입던 날 대부분 자기 옷을 자기가 찢어 발겼지만 교모는 남들이 그 임자 몰래 칼 자국을 내는 것이 유행이었다. 학생이라면 모름지기 책가방이든 교복이든 모자든 깨끗하고 단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저학년 때의 이야기이고, 졸업반들에게는 남의 동네 이야기이다. 뭐든지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찢어지고 깨지고 비뚤어져야 정산인 것이다. 요새 젊은이들은 제 키보다 큰 옷을 입고 다니거나, 멀쩡한 옷을 찢어 입는다든지 남자도 한쪽 귀를 뚫어 귀고리를 하고 다니는 것들은 다 전통이나 어떤 틀 속에 均濟(균제)됨을 거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입시가 코앞에 걸린 고3생들은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 성숙과 미성숙, 구속과 자유가 엇갈리는 생의 언저리에서 학생들이 손쉽게 티를 내거나 경계를 허물 수 있는 것이 고작 교복이나 교모 정도가 아니었겠는가.
모자는 대체로 모범적이고 얌전한 아이의 것일수록 그 겪는 수난의 정도가 심했다. 모자의 상태가 양호할수록 찢는 재미가 솔솔했으므로 '모자'하면 정영일 군이 생각난다.
그는 뒤에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는데 박정희의 유신시절, 동아투위로 신문사를 쫓겨 나와 방황하다가 먹고 살 게 없어서 뒤늦게 사법시험에 도전하여 합격하였다. 나와는 5반의 투 톱으로 여겨질 만큼 담임의 사랑을 받았는데 지금은 꽤 강단있는 변호사로 통하지만 당시에는 얌전하고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그의 모자가 할복 당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지난 시월 어느 날, 무명 흉한의 난도질로 할복을 당한 내 모자다. 물론 이건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순간 나는 나의 생명의 일부 혹은 전체에 어떤 위협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현장에 있어서 그 비운을 구하지 못한 것이 내 못난 탓이라 하겠지만 내가 그 모자의 참변을 더욱 애통해 하는 까닭은 좀 더 다른 데 있다.
그 까닭이란 '내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것이 '남의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는 데 한없는 애착을 느낀다는 말이다. 만약 '내 것'이 아니고 이웃 놈의 것이었다면 한바탕 웃어주고 그 흉한의 기분을 이해해 주려고 노렸했을는지도 모른다...(중략)
모자로 하여 공동체 속의 '나'를 느낄 때가 있다. 공동체 속의 내가 중요하듯이 공동체 역시 중요가치를 가진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그 속에 '나'는 대립되는 문제이다. 어느 한쪽의 존재가치를 지나치게 옹호한 나머지 전체를 어지럽히고 자신까지 파탄으로 이끈 예는 허다하다. 남의 일에 관해서는 정확한 판단을 휘두르지만 자신이 그 일에 관련될 때는 명확한 판단력을 잃는다. 넝마 쪼가리처럼 악취가 진동하는 헌데 투성이를 관이랍시고 머리 위에 모셔 다니는 나의 몰골을 과연 인류 영장의 위신으로 용서할 수 있겠는가? ... 그 녀셕은 앞으로 두어 달이면 모자 이야기를 안 해도 좋게 되겠지만, 우리에게는 몇 천 번의 두어 달이 지나야 정녕 좋은 날이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오늘 저녁은 만신창이가 된 내 모자를 졸업하는 그날까지 걸치고 다닐 수 있게 기우려면 눈웃음을 몇 번쯤 아끼지 않아야 하리라.(1964년 11.29)"
이것은 당시 유수지에 실린 글을 발췌한 것이다. 그가 애착한 모자는 사연이 있었다. 그 모자는 그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 어머니가 온 국제시장을 다 뒤진 끝에 사준 것이어서 특별히 애착이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장장 5년 10개월 간 그 신장 5척 5촌에 헨조카(編上靴, *군화) 1촌 반을 보탠 머리 위에 쓰고 풍상을 이겨내며 다녔으니 그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역대 가보로 남기려고 한 그의 깊은 뜻을 몰라준 '흉한'이 얼마나 미웠으랴. 그 '내 것'을 침해당한지 37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난도질당하여 뒤에 기워 쓰고 다녔다는 그 모자를 보관하고 있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다. 그냥 넘겨버릴 범상한 이야기를 '내 것'이 남에 의해 침해당한 일을 계기로 그 생각을 공동체와 자신의 문제로 발전시켜 이 이 정도의 글을 쓸 수 있었던 고교생의 사고력이 놀랍다.
내 모자 건드리는 놈은 "쥑이 뿔기다"
아무튼 당시 이런 식으로 당한 아이들이 하나둘이 아니었으며, 말로 다 안 해서 그렇지 저간의 사정이야 얼마나 곡진한 바가 있었으랴. 지금도 가슴 아픈 것은 최영승(작고)의 경우이다. 그가 하루는 체육시간이 끝나고 돌아오자 책상 속에 고이 모셔두었던 모자가 없어졌다.
누군가 영승이를 만만히 보고 훔쳐간 모양인데 그 순덕이가 화를 내지는 못 하고 "내는, 기부이 대다이 나뿌다이". 하고 두꺼비처럼 눈만 껌뻑거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군대에서도 철모 도둑놈은 없다는데, 찢어지게 가난했던 영승이는 남의 모자를 대신 훔치지도 못하고 까까중 맨머리로 "안 주나, 안주나, 오늘도 안주나, 줘 바라 머라카나, 안주모 가마 인나바라"하고 '주나 바라' 염불만 하면서 학교에 다녔으나 끝내 돌려 받지는 못하였다. 그 모자 훔쳐간 놈,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으면 제발 그 모자 좀 그 영전에 돌려주시게. 이제는 처벌 시효도 다 지났으니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날이 갈수록 수난을 당하는 아이들은 늘어갔다.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로 둔갑하는 가운데 끝까지 모자가 성한 채로 졸업하는 아이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참고로 말씀드리면 내 모자만은 멀쩡했다. 내가 공개적으로 내 모자를 건드리는 놈은 "쥑이 뿔기다"라고 조석으로 눈을 부라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내 모자가 무사했던 것은 내 공갈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모자가 워낙 낡아 앞 창과 뒤 테가 다 헤져 더 난도질 할 데가, 아니 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교복도 단추가 반드시 몇 개는 떨어져 있었고(은사와 찍은 사진에서 증명됨), 2학기부터는 책가방은 아예 없이 책 보따리에 책을 둘둘 말아 싸들고 다녔던 것이다. 지금 보면 나도 꽤나 불량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불량기들은 다 어디서 온 것일까. 세상에 근본 없는 자식이 어디 있으랴. 한번은 담임 유수현 선생님이 늘 입던 추레한 쥐색 양복 대신에 깔깔한 맘모 즈봉을 입고 학교에 나온신 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 당당함에 아연 놀랐다. 아니, 우리가 이런다고 담임 선생님까지 막가시면 안되는데... 학교에서 대표적인 단벌 신사였던 우리 선생님도 이제 과외 공부 학원에 나가시더니 돈 좀 벌었다고 이리 '포때'를 내도 되는 건가_ 복장 문제만큼은 사제가 피장파장이 되었다.
<2025. 3월 호에 계속>